경부고속철도 경주 덕천리 건설구간내
慶州 德泉里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1. 유적 위치:경북 경주시 내남면 덕천 2리 484-2일원
2. 조사 기간 : 2004년 6월 18일~2006년 9월 11일(예정)
3. 조사 면적 : 35,320㎡
4. 조사 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이백규)
5. 조사의뢰기관 : 한국철도시설공단
Ⅱ. 調査經過
경주 덕천리유적 조사는 한국철도시설공단(舊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추진하는 경부고속철도 경주경유구간에 대해 영남문화재연구원과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1996년 10월 17일~1996년 12월 4일에 걸쳐 지표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송선리, 방내리, 화천리, 화곡리, 덕천리, 월산리지역에 대해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금번의 덕천리유적은 상기 시굴조사를 통하여 알려지게 된 유적중의 하나이다.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원삼국시대의 분묘, 삼국시대 제철공방지, 조선시대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4년 6월 18일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에 있다. 2004년 10월 29일에 덕천리유적의 6개 구역 중 하나인 5구역에 대한 유적의 보존․보호와 관련한 처리 문제, 향후 유적 조사방향에 대한 문제를 두고 1차 지도위원회가 개최된 바 있다. 현재까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및 석관묘, 원삼국시대 목곽묘․옹관묘․토기매납유구․불명유구․수혈, 삼국시대 수혈․구․습지․유물포함층․굴립주건물지,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 조선시대 생활유구 등의 조사가 진행중이다.
Ⅲ. 遺蹟의 立地 및 考古學的 環境
덕천리유적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덕천2리 일원이며 덕천리 평야일대와 이조천이 연결되는 부분의 자연부락주변이다.
덕천리지역은 경주중심지를 기준으로 보면, 서남방면의 교통로상에 위치하며, 이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신은들, 모래물들, 동보들이라 불리는 덕천리 평야를 중심으로 북쪽은 벽도산자락에서 뻗어 내린 수무산, 탈바꿈산, 새비산 등의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이조천이 형산강과 합류하면서 형성된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들 주변의 평지와 구릉지대에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주변유적으로 선사시대의 덕천리지석묘, 월산리지석묘, 상신리지석묘, 월산리유적, 월산리Ⅱ유적과 삼국시대의 덕천리고분군, 부지리고분군, 부지리와요지, 부지리유물산포지, 덕천리유물산포지, 이조리유물산포지, 덕천리야철지 등이 근접한 거리에 분포한다. 또한 최근 발굴조사에서 기마인물형토기․이형토기 등의 중요유물이 출토된 덕천리적석목곽묘(중앙문화재연구원, 2002)유적이 근접하여 위치하고, 고속철도 경주구간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덕천리Ⅱ․Ⅲ유적(청동기시대 주거지 및 조선시대 분묘)의 발굴조사가 진행중에 있다.
경주지역 원삼국시대 유적의 분포는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교통로상에 분포하고 있는데 영천방면의 사라리유적, 포항방면의 옥성리유적, 울산방면의 조양동․구정동․구어리․중산동유적의 분포와 함께 언양방면으로 본 덕천리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Ⅳ. 調査內容
가. 層位
덕천리유적은 하상퇴적층에 유구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는 경지구획정리로 인해 원지형의 상단부분이 삭평되어 거의 평지를 이루고 있지만, 원지형은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유적의 가운데부분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약간씩 낮아진다. 즉 유적의 가운데부분이 저지성구릉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구릉을 중심으로 원삼국시대의 분묘와 청동기시대주거지가 집중분포하고 있다. 전체적 층위는 황갈색점토층(生土層)-역석층-암갈색사질점토층-경작층(表土層)순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삼국시대유물이 포함된 흑갈색사질점토층과 조선시대유물이 포함된 갈색사질점토층의 간층이 확인된다. 유구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다양하게 확인되지만, 원지형의 훼손이 심하여 시기와 상관없이 대부분이 역석층과 암갈색사질점토층에서 확인되며 문화층은 찾기 어렵다.
나. 遺構
경주 덕천리유적은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 등 여러시대에 걸쳐서 다양한 유구가 형성된 복합유적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수혈주거지 9동과 석관묘 1기, 원삼국시대 목곽묘 80기, 옹관묘 50기, 수혈유구 2기, 불명유구 12기, 토기매납유구 8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 유구는 수혈유구 6기, 구 1기, 유물포함층 1개소, 습지 1개소, 굴립주건물지 1동, 토기매납유구 2기 등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도로유구 3기가 확인되었으며, 조선시대 유구는 수혈 11기, 구 4기, 굴립주건물지 2동, 다수의 주혈이 확인되었다.
1) 靑銅器時代
(1) 住居址
현재까지 본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구는 수혈주거지 9동이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조사구역의 남쪽(5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나 석관묘와 주거지가 북쪽의 2구역까지 확인되고 있어 취락의 범위는 조사구역 최남단과 최북단을 제외한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확장될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방형․말각방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장방형인 주거지로는 2호․7호․8호가 있으며, 방형은 1호․6호주거지, 말각방형으로는 9호주거지가 있다. 그 외 3호․4호․5호주거지는 삭평되어 평면형태를 알 수 없다. 장방형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530~742㎝, 너비 338~357㎝이며, 방형과 말각방형주거지는 길이 275~438㎝, 너비 225~314㎝이며 잔존깊이는 34㎝이하로 얕은 편이다. 규모는 2호 주거지가 가장 큰 대형에 속하며, 1호․9호주거지는 소형이다. 소형에 속하는 1호․9호주거지는 형태가 완전하지만 노지시설이 없으며 2호․8호주거지와 인접한 위치에 축조된 점을 통해 볼 때, 2호․8호주거지와 관련된 부속시설로 판단된다.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내부시설로는 주혈․노지가 있으며, 평지성취락으로 내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혈의 배치는 2호주거지를 제외하고는 주혈 배치상의 정형성을 보이지 않는다. 2호주거지는 장벽과 평행하게 등간격의 주주혈이 7개가 확인된다. 7호주거지의 경우, 벽 가장자리를 따라 직경 6~16㎝, 깊이 10㎝ 이하의 주혈이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노지는 3호․4호․5호․6호․8호주거지에서 확인되며, 모두 토광형노지이다. 노지의 평면형태는 원형․타원형․부정형이 있으며, 규모는 직경 50~115㎝, 깊이 5㎝로 단벽 쪽에 치우쳐 설치되어 있다. 상면처리는 2호․8호주거지의 경우, 바닥을 정지한 후 불다짐하였고, 그 외 주거지는 굴착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거지의 폐기는 2호주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주거지는 내부토의 퇴적양상과 목탄의 검출양상을 통해 볼 때 자연폐기된 것으로 보이며, 2호주거지는 다량의 목탄과 함께 확인되는 소토를 통해 볼 때 화재로 인한 폐기로 판단된다.
유물은 홍도, 발, 호, 석검, 석도, 석촉과 미완성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2) 石棺墓
석관묘는 주거군의 북쪽에 치우쳐 위치한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158㎝, 단축 123㎝, 깊이 30㎝이며, 석관의 규모는 동단벽과 북장벽의 벽석일부가 탈락되어 명확치 않다. 축조는 길이 30~65㎝, 두께 10~20㎝의 판석을 이용하여 먼저 서단벽을 1매의 판석을 기준으로 남․북의 장벽을 3~4매의 판석을 세운 후, 묘광과 벽석사이에 10~15㎝의 천석과 흙으로 충진하였다. 바닥은 10~20㎝의 비교적 편평한 천석을 이용하여 3~4열로 깔았다. 유물은 바닥에서 홍도 1점, 석촉 3점, 미완성석검 2점이 출토되었다. 석관의 벽석과 내부에 다량으로 확인되는 돌에서 불맞은 흔적이 관찰되며 바닥에 목탄과 함께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는 점에서 화장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2) 原三國時代
본 유적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원삼국시대 유구는 분묘와 관련한 유구로써 목곽묘 80기, 옹관묘 50기, 토기매납유구 8기, 불명유구 12기, 수혈유구 2기 등 총 152기이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 유구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감안한다면 유구의 수는 증가될 것으로 판단되며, 예상유구수는 목곽묘 130기, 옹관묘 70기정도이다. 유구의 분포는 조사구역 최북단과 최남단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확인되며 지대가 조금 높은 가운데부분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다수의 무덤이 경지구획정리에 의한 삭평으로 상부토 제토과정에서 부장유물이 노출된다.
(1) 木槨墓
목곽묘는 현재까지 80기가 확인되었으며, 60기가 조사되었다. 대부분 조사구역 중앙에 밀집되어 조성되었다. 개별 무덤간의 시기차이는 약간씩 보이지만 중복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목곽의 평면형태는 거의 장방형을 띠며 일부 세장방형인 것도 확인된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194~520㎝, 단축 92~220㎝이다. 목곽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하며 약간씩 남북으로 틀어진다. 두향은 모든 목곽묘에서 경식이 출토되진 않았지만 경식이 출토된 목곽묘를 통해 볼 때 모두 동향으로 판단된다.
부장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로 나눌 수 있으며, 토기는 대부분 서단벽쪽(발치쪽)에 부장되며 장벽의 가장자리 또는 두향인 동단벽에 부장되기도 한다. 토기는 와질이며 단경호, (유개)대부광구호, (유개)대부직구호, (유개)노형토기, 고배, 양이부호, 발, 파수부호, 개가 주를 이루며, 소수에 불과하지만 오리모양토기, 신선로형토기가 공반되어 출토되기도 한다. 철기는 철모, 철부, 철겸, 따비, 철촉, 환두대도, 철착, 판상철부, 도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유물별 부장위치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철모는 무덤의 단축과 평행 또는 직교되게 목곽 가장
자리에 부장되거나 시신 아래에 깔고 있다. 철부, 철촉, 철겸, 따비의 부장은 시신을 중심으로 머리, 허리, 발 등 다양한 위치에서 출토된다. 철부, 철겸, 따비는 3점이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장신구로는 수정제곡옥, 수정제다면옥, 마노제다면옥, 유리제환옥으로 구성된 경식이 주를 이루는데 15호묘와 24호묘에서는 금박샌드위치구슬이 출토되기도 한다.
조사된 대표적인 목곽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3호묘
분묘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목곽묘이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장단비가 3.28:1인 세장방형이며,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86°-E)이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479㎝, 단축 146㎝, 잔존깊이 24㎝이며, 목곽의 규모는 장축 440㎝, 단축 135㎝이다. 목곽의 구조는 서단벽쪽의 토기와 중앙부분의 토기 사이에 20~30㎝의 공간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격벽을 둔 동혈주부곽식으로 판
단된다. 유물부장은 격벽을 기준으로 부곽과 주곽에 나누어 부장하였다. 서단벽쪽의 부곽에는
유개대부광구호 3점, 유개노형토기 3점, 단경호 1점 등 토기유물만 부장하였으며, 주곽에는 토기와 철기를 함께 부장하였는데, 주곽의 서편에는 유개대부직구호 1점, 유개노형토기 1점과
철부 2점, 따비 1점, 철겸 1점, 도자 1점을 동편에는 철모 13점, 유자이기 1점, 도자 1점, 철부
1점, 유경식철촉 20점을 부장하였다.
② 16호묘
유적의 북쪽에 위치하며 분묘군내에서는 최북단에 단독으로 조성된 목곽묘로 동단벽이 조선시대 10호 수혈에 의해 파괴되었다. 묘광의 주축방향은 N-88˚-W로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한다. 묘광의 규모는 (현)장축 412㎝, 단축 172㎝, 잔존깊이 20㎝이며 목곽의 규모는 (현)장축 394㎝, 단축 132㎝이다. 목곽의 구조는 서단벽쪽의 토기와 중앙부분의 토기 사이에 격벽을 둔 동혈주부곽식으로 판단된다. 유물부장은 격벽을 기준으로 부곽과 주곽에 나누어 부장하였다. 서단벽쪽의 부곽에는 유개대부직구호 3점, 단경호 3점, 고배 8점, 오리모양토기 2점, 양이부호 1점, 연질소호 1점과 철부 2점을 부장하였고, 부곽에는 신선로형토기 1점, 유개대부직구호 1점, 따비 1점을 부장하였다.
③ 19호묘
분묘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목곽묘로서 3호묘에서 북쪽으로 10m 떨어져 조성되었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장단비가 2.89:1인 장방형이다. 묘광의 주축방향은 N-75°-W로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한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495㎝, 단축 171㎝, 잔존깊이 20㎝이다. 목곽의 규모는 장축 452㎝, 단축 132㎝이다. 목곽의 구조는 서단벽쪽의 토기와 판상철부 사이에서 격벽의 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동혈주부곽식으로 판단된다. 19호묘에서 특이한 점은 내부토에서 다량의 목탄이 확인되는 점이다. 목탄은 유물의 상부와 하부의 2개층으로 구분된다. 유물의 상부에서 확인된 목탄은 장축방향의 판재형 목탄과 단축방향의 각재형의 목탄으로 주곽이 소각된 것으로 판단된다. 판재형의 목탄은 길이 5~65㎝, 너비 5~15㎝, 두께 0.8㎝내외로 장축과 평행하며 장벽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각재형의 목탄은 단축과 평행하며 동단벽쪽에서 소량 확인된다. 유물아래의 목탄은 대부분 목탄이 부스러기형태로 그 형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목곽의 소각행위는 당시의 매장풍습으로 보이나 소각의 시점과 그 의도는 명확치 않다.
부장유물은 격벽을 기준으로 주곽과 부곽에 나누어 부장하였다. 주곽에는 개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기와 장신구를 부장하였다. 철기는 판상철부와 철모가 주를 이루는데, 주곽의 서편에는 판상철부 10매를 장축방향으로 깔았으며, 주검의 아래쪽에는 철모를 등간격으로 15점을 깔았다. 그 외에 환두대도 1점, 철부 3점, 따비 1점, 철환 1점, 철촉 2점 등이 출토되었다. 장신구는 두향인 동단벽에 출토된 경식 1점과 발치쪽에서 수정제다면옥 2점, 수정제곡옥 1점이 출토되었다. 부곽에는 단경호 2점, 노형토기 1점, 유개대부광구호 6점, 대부광구호 2점, 고배 1점, 개 3점과 철촉 3점을 부장하였다.
④ 40호묘
분묘군의 서쪽에 위치한 목곽묘이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장단비가 2.28:1인 장방형이며,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80°-E)이다. 묘광이 규모는 장축 362㎝, 단축 159㎝, 잔존깊이 28㎝이며, 목곽의 규모는 장축 320㎝, 단축 117㎝이다. 유물은 유개노형토기 1점, 유개대부직구호 1점, 노형토기 3점, 대부광구호 1점, 단경호 1점, 광구호 2점, 파수부호 1점과 철부 2점, 철모 1점, 무경식철촉 2점, 도자 1점 등을 부장하였다. 토기는 대부분 서단벽쪽(발치쪽)에 부장하였고, 철기는 북장벽에 치우쳐 부장하였다. 동단벽쪽에 파수부호 1점을 부장하였다. 내부시설로 장벽의 충진토 아래에서 목곽의 결구와 관련된 4개의 목주시설이 확인된다.
⑤ 70호묘
분묘군의 남쪽에 위치한 목곽묘로 현재 조사중이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장단비가 2.69:1인 장방형이며, 주축방향은 동-서방향이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430㎝, 단축 160㎝, 잔존깊이 약 12㎝이다. 목곽의 규모는 장축 370㎝, 단축 100㎝이다. 유물은 오리모양토기, 신선로형토기, 단경호, 고배 등을 부장하였으며, 동단벽쪽에는 방추차, 철모, 철겸, 철부, 경식 등을 부장하였다.
⑥ 80호묘
분묘군의 남쪽에 위치한 목곽묘로 현재 조사중이다. 70호묘에서 남쪽으로 8.5m 떨어져 위치한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장단비가 2.37:1인 장방형이며, 주축방향은 동-서방향이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520㎝, 단축 220㎝, 깊이 20㎝이며, 목곽의 규모는 장축 470㎝, 단축 170㎝로 확인된 목곽묘 중 가장 큰 대형묘이다. 부장유물은 토기, 철기, 경식으로 구분된다. 토기는 서단벽쪽에서만 확인되는데 오리모양토기, 신선로형토기, 유개대부직구호, 대부광구호, 단경호 등을 부장하였다. 철기는 유자이기, 환두도, 철모, 철부, 다량의 철촉 등을 부장하였다.
(2) 甕棺墓
옹관묘는 현재까지 50기가 확인되었으며, 40기가 조사되었다. 옹관의 분포는 목곽묘 사이에 고르게 확인되며 봉토가 남아있지 않아 단정지울 수 없지만 목곽과 옹관이 인접한 경우는 동일봉토 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표4 참조). 대부분의 옹관묘가 토기의 상부가 결실된 채 확인되며, 봉토는 남아 있지 않다.
옹관의 구조는 합구식이 47기, 단옹식이 3기이다. 합구식의 규모는 길이 64~143㎝, 너비 40~83㎝이며, 단옹식의 규모는 길이 61~87㎝, 너비 37~78.5㎝로 비슷하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목곽묘와 동일하게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하며 약간씩 남북으로 틀어진다. 두향은 주축방향이 일정하고 경식의 출토 위치로 보아 동향으로 판단된다.
합구식옹관묘는 대다수가 동편에 주옹이 서편에 막음옹이 위치한다. 주옹은 장동옹, 단경호, 발, 대호, 시루를 사용하였으며, 막음옹은 (파수부)발, 단경호, 장동옹, 노형토기 등을 사용하였는데 모두 와질이다. 단옹식옹관묘는 대부분 대호가 확인되며 구연부를 서향으로 매납하였다. 부장유물은 3호, 10호, 39호에서만 출토되는데 3호의 경우, 노형토기 1점이 주옹과 접해서 확인되며, 10호의 경우는 주옹내에서 수정제곡옥 2점이 출토되었다. 39호는 주옹바닥에서 수정제곡옥 2점, 도자 1점, 막음옹의 아래에 단경호 2점, 주옹 아래에서 철촉 2점이 출토되었다.
① 1호 옹관묘
분묘군의 북쪽에 위치한 합구식옹관묘이다. 54호묘에서 북쪽으로 50㎝ 떨어져 위치한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이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82˚-W)이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94.5㎝, 너비 62.5㎝, 잔존깊이 24.5㎝이다. 옹관의 규모는 길이 67㎝, 너비 45㎝이다. 동편의 주옹은 단경호를 사용하였고 서편의 막음옹은 파수부발이 사용되었다. 바닥에 별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구연부가 맞닿는 부분에 크기 5~15㎝정도의 천석을 괴어 옹관을 고정시켰다.
② 18호 옹관묘
분묘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합구식옹관묘이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이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66˚-E)이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76㎝, 너비 58.1㎝, 잔존깊이 20㎝이다. 옹관의 규모는 길이 60.2㎝, 너비 45.2㎝이다. 동편의 주옹은 단경호, 서편의 막음옹은 발을 사용하였다. 내부에서는 별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③ 23호 옹관묘
분묘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합구식옹관묘이다. 남쪽으로 약 1m 떨어진 위치에 37호묘가 위치한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이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85˚-W)이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78㎝, 너비 62㎝, 잔존깊이 13㎝이다. 옹관의 규모는 길이 56㎝, 너비 48㎝이다. 서편의 주옹은 시루, 동편의 막음옹은 노형토기를 이용하였다. 옹관을 안치한 후, 옹관 결합부분은 대호편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덮고 있다.
④ 39호 옹관묘
분묘군의 남서쪽에 위치한 합구식옹관묘이다. 묘광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이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N-75˚-E)이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143㎝, 너비 81㎝, 잔존깊이 37㎝이며, 옹관의 규모는 길이 106㎝, 너비 59㎝이다. 동편의 주옹은 대호, 서편의 막음옹은 파수부발을 사용하였다. 부장유물로는 주옹의 내부 바닥에서 수정제곡옥 2점과 도자 1점, 막음옹 아래에서 단경호 2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바닥조사시, 주옹 아래에서 무경식철촉 2점이 출토되었다.
(3)土器埋納遺構
토기매납유구는 총 8기가 확인되어 5기가 조사되었다. 定置 또는 倒置된 상태로 토기를 매납하는 점에서 옹관묘와는 차이를 보이므로 墓로 보기는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토기매납유구라 칭한다. 주로 대호를 매납하였으며, 단경호와 발도 확인된다.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을 띠며, 규모는 길이 32~125㎝, 너비 32~122㎝, 잔존깊이는 14.5㎝ 미만으로 상부는 거의 삭평되었다.
(4) 不明遺構
성격이 불명확한 유구를 일단 불명유구로 명명하였으며, 총 12기가 확인되어 9기가 조사되었다. 불명유구는 목곽묘와 옹관묘의 주변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원형․타원형이 있으며, 규모는 길이 100~470㎝, 너비 74.5~165㎝, 잔존깊이는 25㎝미만이다. 유물은 대호,
단경호, 노형토기, 컵형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된다. 유구의 성격은 상부가 거의 삭평되어 정
확히 알 수 없지만, 목곽묘와 인접하고 있고, 토기를 인위적으로 파쇄한 점에서 목곽묘 조성
과 관련한 제사유구로 추정된다.
3) 三國時代
현재까지 조사된 삼국시대 유구는 유물포함층, 수혈, 굴립주건물지, 구, 습지 등이 있다. 삼국시대 1호 구를 제외한 대부분 유구가 유적의 남쪽(5구역)에 위치한 습지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이 습지 주변으로 유물포함층, 수혈유구, 굴립주건물지가 서로 중첩된 양상이다.
(1) 遺物包含層
유물포함층은 습지의 남동편을 감싸는 형태로 습지의 경사면을 따라 퇴적된 양상으로 형성되어 있다. 규모는 길이 40m, 너비 10m내외이다. 남쪽부분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3호 도로유구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다. 유물포함층에서는 다량의 토기유물과 철광석․용범편․송풍관편 등의 제철유구와 관련된 유물이 다량 출토하고 있다.
(2) 竪穴遺構
수혈유구는 유물포함층 아래와 주변에서 확인되는데 총 6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부정형 또는 원형을 띠며, 규모는 길이 132~700㎝, 너비 122~570㎝, 잔존깊이 19~50㎝이다. 수혈 내에는 별다른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1호와 3호의 경우, 수혈 바닥에 부정형의 소형구덩이가 확인된다. 수혈의 내부는 모두 암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다. 유물은
고배, 장경호, 배, 기대, 시루, 옹, 개, 방추차 등의 토기류와 철광석․용범편․송풍관편․노벽편 등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된다. 토기류는 동일개체를 의도적으로 깬 양상이다.
(3) 屈笠柱建物址
굴립주건물지는 수혈군의 동편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장방형이며,주축방향은 N-30˚-E이다.
(4) 濕地
습지는 부정형의 평면형태를 띠며, 바닥면이 불규칙적이다. 규모는 현너비 50~60m, 최대깊이는 60㎝이다. 층위는 흑갈색점토층과 회황갈색점토층으로 크게 2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국시대 유물포함층을 덮고 있다. 출토유물은 습지최상층에서 인화문토기가 확인되며 바닥면의 출토유물은 유물포함층 및 수혈과 유사하다.
(5) 溝
구는 유적의 북쪽과 남쪽에서 확인되는데, 진행방향과 규모,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유구 진행방향은 남북방향으로 유적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구의 남쪽은 남북으로 진행하다가 서쪽으로 굴절되어 조사경계 밖으로 연장된다. 평면형태는 ‘ㄴ’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을 띤다. 구는 암갈색사질점토와 역석층을 비스듬하게 굴착하였으며, 규모는 추정길이 300m, 너비 150~420㎝, 깊이 50~65㎝정도이다. 구의 내부토는 ‘U’자상으로 최하층에 자갈과 모래가 다량으로 섞인 황갈색사질점토가 퇴적되어 있다. 유물은 다량의 기대 대각편, 용범편, 호, 시루, 고배, 대호, 대부완 등이 출토되었다. 구의 용도는 현재로선 명확하지 않다.
4) 統一新羅時代
(1) 道路遺構
도로유구는 유적의 북쪽에 2기, 남쪽에 1기 총 3기가 조사되었다. 북쪽의 도로유구는 동일유구로 보아도 무관하지만 진행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남북방향의 1호 도로유구와 동서방향의
2호 도로유구로 구분된다. 5구역에서 확인된 3호 도로유구는 2조의 차륜흔만 확인된다. 도로의 축조방법은 굴착이나 판축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일정 범위의 평탄한 자연지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오랜 기간의 사용으로 인해 차륜흔이 여러 방향으로 중첩된 양상으로 확인된다. 차륜흔의 평면형태는 직선형 또는 곡선형이며, 단면형태는
대부분이 ‘U’자형이나 여러 차례의 중복으로 인해 ‘W’자형을 띠기도 한다. 구(차륜흔)의 규모는 너비 10~40㎝, 잔존깊이 5~40㎝이며, 차륜흔의 폭은 180~200㎝이다. 구(차륜흔)내에는 황갈색사질점토 또는 암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으며, 바닥에는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깐 잔자갈이 오랜 사용으로 인해 견고하게 다져진 상태이다. 출토유물은 구(차륜흔)내에서 잔자갈과 함께 파쇄 된 채로 확인되는데 인화문토기편 등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하다.
도로유구의 사용시기는 출토유물이 빈약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도로가 형성된 암갈색사질점토층에서 점원문이 시문된 토기편이 확인되며, 구 바닥에서 출토된 종장연속마제형문(7세기후반-8세기전반)이 시문된 토기편과 기와편, 당삼채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로 판단된다.
5) 朝鮮時代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유구로는 수혈유구 11기, 굴립주건물지 2동, 구 4기, 다수의 주혈 등이다. 대부분의 유구가 유적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주거지군과 습지 사이에 위치한다. 수혈은 서쪽에 치우쳐서 위치하며 주혈군은 동쪽에 밀집되어 확인되었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원형, 타원형, 부정형으로 구분된다. 규모는 길이 68~339㎝, 너비는 68~200㎝, 깊이 8~53.5㎝이다. 내부토는 소량의 목탄이 혼입된 암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다. 수혈 중 6호, 8호 수혈은 옹기가 매납되어 있으며, 9호 수혈은 바닥과 벽면에 불 맞은 흔적이 확인된다. 11호 수혈은 내부시설로 노지 1개가 확인된다. 노지는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길이 100㎝, 너비 70㎝정도이다. 북장벽 중앙에는 바닥에서 10㎝정도 흙을 채우고 천석을 편평하게 놓은 출입구 시설이 확인된다. 내부에서는 자기편, 옹기편, 기와편, 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굴립주건물지는 2동이 확인되었으며 수혈군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1호 굴립주건물지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규모는 길이 610㎝, 너비 290㎝로 세장방형이고 장축방향은 N-71˚-W이다. 2호 굴립주건물지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규모는 길이 290㎝, 너비 260㎝로 방형이고 장축방향은 N-44˚-E이다.
구는 대부분이 주혈군의 남쪽에 위치하며, 구의 진행방향은 동-서방향이다. 동쪽경계 밖으로 연장된다.
다. 遺物
덕천리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형성된 복합유적으로 유물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유물은 대다수가 주거지 출토유물로 토기 30점, 석기 43점이다. 토기 발, 호, 홍도 등의 토기류와 석부, 석도, 지석, 석착, 미완성석기, 박편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1기 확인된 석관묘에서 무경식석촉 3점, 미완성석검 2점과 함께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한다.
원삼국시대유물은 주로 목곽묘와 옹관묘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부 불명유구와 토기매납유구에서 소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로 구분되는데, 현재까지 출토된 목곽묘출토 토기 유물은 대다수가 와질이며 일부 목곽묘에서는 도질토기와 와질토기가 공반되기도 한다. 목곽묘에서 출토된 토기는 단경호, (유개)대부광구호, (유개)대부직구호, (유개)노형토기, 고배, 양이부호, 발, 파수부호, 개 등이, 16호묘, 70호묘, 80호묘에서는 오리모양토기, 신선로형토기가 공반되어 출토되기도 한다. 철기는 철모, 철부, 철겸, 따비, 철촉, 환두대도, 철착, 판상철부, 도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철모의 비중이 가장 높다. 장신구류는 수정제곡옥, 수정제다면옥, 마노제다면옥, 유리제환옥으로 구성된 경식이 주를 이루는데 15호묘와 24호묘에서는 금박샌드위치구슬이 출토되기도 한다. 옹관묘는 장동옹, 단경호, 파수부발, 대호, 시루 등을 주옹으로 사용하였으며, 막음옹은 (파수부)발, 단경호, 장동옹, 노형토기 등을 사용하고 있다. 그 외 토기매납유구와 불명유구에서 소량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고배, 장경호, 배, 기대, 시루, 옹, 개, 방추차 등의 토기류와 철광석, 용범편, 송풍관편, 노벽편 등의 제철관련 유물이 출토되는데 대부분 습지 주변에 형성된 유물포함층과 수혈에서 출토되었다. 1호 구의 출토유물과 비교하면, 토기는 기종의 차이를 보이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되는 점에서 동일시기로 보아도 무관할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당삼채편, 인화문토기편, 기와편, 어망추, 구슬 등이며, 대부분 도로의 차륜흔(구)내에서 출토되었다.
이상과 같이 덕천리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다양하게 확인되며, 각 시대별 유구의 시기는 출토유물을 통해 볼때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석관묘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늦은 시기로 판단되며, 원삼국시대 분묘는 3~4세기, 삼국시대 유구는 5~6세기, 도로유구는 통일신라시대(7~8세기)로 판단된다.
Ⅴ. 調査成果 및 意義
1. 본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충적평야지대에 위치한 평지성취락으로 주거지의 구조와 내부시설에 있어 평지성취락연구에 자료를 제공 할 것으로 판단되며, 1호 석관묘에서 확인된 화장의 흔적은 당시 묘제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2. 현재까지 경주 인근의 원삼국시대의 분묘는 경주 황성동과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언양방면을 제외한 영천방면의 사라리유적, 포항 방면의 옥성리유적, 울산방면의 조양동․구정동․구어리 중산동유적 등 동서남북의 교통로상에 분포하고 있다. 이번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지 않았던 언양방면에 본 유적의 존재는 초기신라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또 다른 집단의 존재를 확인한 점에서 그 의미가 크며, 초기 신라 정치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 할 것으로 판단되며, 아울러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곽묘, 옹관묘, 토기매납유구, 불명유구 등은 원삼국시대의 묘제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3. 원삼국시대 목곽묘인 19호묘에서 확인된 목탄은 타 유적에서도 아주 드물게 확인되는 점에서 특정개인을 위한 당시 매장풍습과 관련된 의례행위로 판단된다.
4. 삼국시대의 습지 주변으로 형성된 삼국시대유물층 및 수혈유구에서 출토되는 철광석, 용범, 송풍관, 노벽, 슬래그 등의 유물과 삼국시대 1호구의 출토유물과 비교하면, 토기에서 기종의 차이를 보이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되는 점은 동일하다. 그리고 시굴조사(6구역)에서 제철유적이 확인된 점에서, 당시 이 일대에는 전문적인 철기생산 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유적의 남쪽과 북쪽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는 도로의 규모와 축조방법상 경주 왕경지구에서 확인되는 도로와 차이를 보이며, 그 용도는 조사구역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다만, 도로의 차륜흔 내에서 확인된 제철관련 슬래그와 차륜흔의 깊이, 그리고 유적북쪽의 지근거리에 덕천리 야철지가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제철과 관련한 수송용 도로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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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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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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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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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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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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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구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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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목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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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목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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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목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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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곽묘 출토유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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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곽묘 출토유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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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곽묘 출토유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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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구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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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수혈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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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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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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