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 漆谷 3宅地開發區域內 Ⅰ區域 發掘調査 大邱 東川洞 마을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가. 遺 蹟 位 置 : 大邱廣域市北 北區 東川洞 380番地 一帶
나. 調 査 期 間 : 1997. 7. 10~1998. 12. 31)
다. 調 査 範 圍 : 18,644여평(61,408㎡)
라. 調 査 機 關 : (社)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院長 : 李白圭)
마. 調査依賴機關 : 韓國土地公社 慶北支社
Ⅱ. 調査經過
한국토지공사는 칠곡 3지구에 대한 개발계획을 추진하고자, 1995년도에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였다. 지표조사 결과, 유적의 분포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996년
우리 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4(Ⅰ,Ⅱ,Ⅲ,Ⅳ)개 구역의 유적산포지를 확인하였다. 이들 4개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우리 연구원에서 Ⅰ․Ⅳ구역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는 Ⅱ․Ⅲ구역을 각각 나누어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Ⅰ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단순 주거유적만이 분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예상밖으로 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형태의 주거지를 비롯하여, 石棺墓, 우물, 水邊祭祀遺構, 集水池, 推定耕作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유구가 상당수 확인되었다.
이번 발굴에 앞서, 칠곡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8년도에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구암동고분군이 조사되었고, 1993~1994년 경북대학교 박물관과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칠곡 2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 未刊)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基와 삼국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조사된 바 있다.
Ⅲ. 調査內容
1. 遺蹟現況
유적이 위치한 칠곡 3지구는 지리적으로 八公山의 지맥인 架山일대에서 發源하여 북구
팔달동에서 금호강과 합류하는 팔계천과, 道德山에서 발원하는 반포천이 합류하게 되는 汎濫原인 평지에 입지하고 있다. 조사지역은 폭이 1.5km정도 되는 팔계천의 유역 중 가장 넓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들말’이라는 충적평야지대의 서편에 해당된다. 유적의 동남쪽에는 八莒山城과 鳩岩洞古墳群(1978년 영남대학교박물관 조사)이 자리한 函芝山(해발273m)이, 서쪽으로는 구암동 支石墓와 北室古墳群이, 남쪽으로는 팔달동유적(1992년 경북대학교박물관 조사, 1996~97년 본 연구원에서 조사)이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서쪽으로 70m정도 떨어져서 팔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고,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에 실시된 경지정리로 인해 유적 주변은 최근까지 논과 밭 등의 경작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었고, 강변쪽에는 마을이 일부 조성되어 있었다.
본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단일문화층으로, 유구가 확인되는 문화층은 황갈색 사질점토층으로 현지표에서 50cm정도 아래에서 나타난다. 황갈색 사질점토층아래에는 자갈층과 모래층이 퇴적되어 있고, 현지표에서 아래로 약 2.7~3m 지점에서는 암반이 나타난다. 문화층인 황갈색 사질점토층이 현지표 바로 아래에 위치한 결과, 최근 경작흔과 각종 지상건조물에 의해 상당수의 유구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문화층이 거의 평탄하면서 약간의 굴곡을 보이고 있어 상대적으로 낮은 부분은 피해를 입지 않고,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본 유적은 川邊에 입지하고, 해발고도 또한 河床에 비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流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강변쪽에 위치한 주거지가 물에 의해 잘려져 나간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流水에 의한 수직, 수평적 침식 활동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구가 확인되는 황갈색 사질점토층 상면에는 약 30cm내외의 흑갈색 사질점토층이 있었는데, 그 상면이 남아있는 청동기시대 구지표로 판단된다. 이 층은 황갈색사질점토층이 후대에 전면퇴적(삼국시대이후 추정)이 되고 나서 상부 퇴적층에 의해 형성된 지하수 또는 침출수 등에 의해 토양색이 변색된 것으로서, 이 層에서는 유구확인이 불가능하므로 흑갈색층을 일괄적으로 모두 제토한 후 조사에 임하게 되었다.
2. 遺構
1) 住居址
본 유적에서는 총 57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평면형태는 장방형, 방형, 원형(말각방형포함)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장방형주거지는 현재까지 3기만이 확인되었는데 주거지의 내부바닥에는 남쪽에 편재해서 노지가 1개 설치되어 있고, 벽구나 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원형주거지와 직접적으로 중복되지는 않았으나, 방형주거지의 경우로 보아 원형주거지보다는 시기가 앞서는 것으로 판단되고, 방형주거지와는 거의 시기가 비슷하거나 약간 앞서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출토유물이 거의 없고, 중복관계 또한 없어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방형주거지는 모두 12기가 확인되었고, 넓은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
중 3基가 원형주거지와 중복되어 있고, 모두 원형주거지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거지의 내부 중앙에는 대부분 노지(무시설식)를 1개 설치하였고, 출토유물은 거의 없다. 한편, 주거지 깊이 또한 물에 의한 수평침식으로 상당부분 삭평되어 원형주거지보다 상당히 얕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방형주거지는 원형주거지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이 분명하다.
원형주거지와 (장)방형주거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노지의 유무이다. 장방형이나 방형주거지는 모두 주거지 내부바닥에 반드시 노지가 설치되어 있으나, 원형주거지는 대부분 노지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유적의 제일 남쪽에 조성된 1호 주거지(?)만이 바닥 중앙에 노지가 1개 설치되어 있는데, 본 주거지는 원형주거지군에서 90m이상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주변에 석관묘가 위치하는 점, 또 주거지의 크기가 제일 작다는 점(직경 250cm) 등을 고려해볼 때, 주거지가 아닌 다른 성격의 유구일 가능성도 있다. 원형주거지는 장방형이나 방형보다 그 수가 월등히 많지만, 그 분포에 있어서는 (장)방형주거지보다
다소 밀집되어 있는데, 2~3기의 주거지가 群를 이루는 형태도 관찰된다. 원형주거지는 서로 중복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시기차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나, 시기폭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원형주거지중 일부 주거지의 경우 주거지의 개축이 확인된다. 즉, 주거지 바닥 중앙에 조성된 주혈이나 벽쪽에 위치한 주혈이 서로 중복되어 설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주거지의 개축과 관계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부여송국리와
거창 대야리주거지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이러한 주거지의 개축(원위치개축)은 원형주거지의 성격규명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형주거지군중 남쪽에 위치한 주거지는 경작지와 중복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주거의 입지가 점차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결과로 판단되고, 이동의 원인은流水에 의한 지형의 변형과 침식등으로 판단된다. 원형주거지는 출토유물이 거의 없는 점, 노지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점, 개축이 된다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오랜기간 사용될 수 있는 주거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주거지는 3시기 또는 그 이상으로 분기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
고, 원형주거지보다 (장)방형주거지가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거지의 입지형태 또한 시기적으로 변화가 관찰되며, 평면형태 또한 (장)방형에서 원형으로 점차 변화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2) 環濠
환호는 모두 3기이다. 환호는 대체로 주거지군 외곽, 특히 동쪽부분에 잘 남아 있는데, 북쪽과 서쪽, 남쪽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동쪽을 제외하고 확인되지 않은 것은 물에 의해 침식되어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조사구역 바깥으로 계속 연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거지군의 북동쪽에 동-서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는 환호는 깊이가 매우 얕다. 특히 남-북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 환호보다 그 깊이가 얕은데, 중복관계로 보아 환호보다 시기적으로는 약간 앞서는 것으로 판단된다. 환호의 진행방향을 보아 대체로 주거군을 감싸고 도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대부분 양끝이 하상에 의해 잘려져 나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동-서방향의 환호는 (장)방형주거지와 관계되는 것으로 보이고, 남-북 방향으로 설치된 환호는 원형주거지와 관계될 가능성이 많다. 남-북향의 환호는 폭이 130cm내외, 깊이가 80cm내외이고, 바닥에는 별도의 구가 일부 조성되어 있고, 유물은 무문토기와 석기가 일부 수습되었다.
3) 石棺墓
石棺墓는 모두 6基가 조사되었다. 이들 石棺墓 중 개석과 벽석상태가 양호하게 남은 것은 2基(1, 2호), 개석은 유실되어 없으나 벽석 일부만이 남은 것이 2基(3, 6호), 그리고 바닥석만 남은 것이 또한 2基(4, 5호)이다. 석관묘는 대개 주거군과는 약간 거리를 두고 설치되거나 경작지내에서도 河床쪽에 근접해 조성하는 등, 경작면적에의 점유를 최대한 줄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평면형태는 대개 ‘ㅍ’자 형태를 취하고 있고, 장축방향은 동-서, 또는 남-북 방향을 보이고 있다. 벽석은 판석 1매 또는 1매이상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2호
석관묘의 이 경우, 판재벽석을 삼국시대 석곽묘와 같은 양상으로 세로쌓기 한다음 그 안쪽에 ‘ㅍ’자 형태로 주체부를 만들고, 그 사이에는 큰 강돌로 채워 넣은 다음, 개석을 덮어 축조하였다. 석관묘내 출토유물로는 1호에서 유경식석촉이 7점 출토되었고, 6호 석관묘에서 단도마연토기와 유경식석촉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경작유구와의 배치관계를 통해
볼 환때, 적어도 석관묘는 경작지와는 동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장)방형주거지또는 이른 시기의 원형주거지와 동시기로 추정된다.
4) 集石遺構
가. 1호 (석기 제작장)
유적 남동부에 위치하며 석기 제작장으로 추정된다. 판석상의 강돌 4개를 윗면이 편평하도록 붙인것으로서, 주위에는 미가공 돌들과 미완성 석기, 격지가 상당량 흩어져 노출되었다. 출토유물은, 미완성품이 대부분인데, 굴지구 및 반월형석도 미완성품 등을 비롯해 석부, 격지 및 무문토기편이다.
나. 3호
2호 集水池邊에 조성된 집석유구이다. 이 유구는 집수지와 동일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확인되었고, 동-서 4m, 남-북 2.5m의 긴 타원형의 수혈을 판 다음, 그 안에 가로 230cm, 세로 120cm, 높이 50cm이상의 장방형 석축을 쌓고, 다시 그 윗면에 치석된 큰 판석을 1매 올려 놓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방형 석축의 내부에는 외곽돌보다는 작은 강돌을 채웠다. 판석은 길이 110cm, 폭 50cm, 두께 5.5cm의 잘 다듬어진 화강암제로 북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노출되었다. 이와 유사한 예로 2호 석관묘의 경우 개석은 아니면서 석관묘와 근접해서 3호 집석유구의 판석과 같은 양상의 판석 2매가 놓여져 있었는데, 석관묘의 부속재가 아니라 의례행위와 관계되는 성격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集水池내에서는 상당량의 토기편과 석기,격지,강자갈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토기류의 50%는 단도마연토기였다. 토기는 대부분 파쇄되어 있었고, 석기 또한 의도적으로 깬 것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본 집석유구는 물과 관련된 의례행위(水邊祭祀遺構)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구와 유사한 유적으로는 산청 묵곡리유적의 예가 있다.
5) 掘立柱 建物
주거지가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서편에 굴립주 건물지가 상당수 조성되어 있다. 전체 주혈은 1,000여개가 확인되었으나, 이 중 건물단위가 확인되는 것은 19棟이다. 단위가 확인되지 않는 주혈중 상당수는 굴립주건물 주혈로 판단되나, 현재 조사중에 있으므로 향후 더 확인될 가능성이 많다. 굴립주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에서부터, 정면 8칸, 측면 2칸까지 다양하다. 굴립주 건물이 확인되는 지역은 유적 남동부에 위치한 1호를 제외하고, 대부분 원형주거지의 분포권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이 굴립주 건물은 원형주거지와 서로 중복되어 있어서 원형주거지와 그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굴립주 건물의 형식은 다음 표와 같다.
6) 集水池
유적의 제일 남동부에는 경작지면보다 약 40cm정도 낮은 微低地지형을 보여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물과 관련된 시설이 2개소 확인되었다. 1호 集水池는 12m×7.5m, 깊이 114cm의 타원형의 형태로서 경작지내의 溝들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물이
모여서 고일수 있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집수지 바닥은 자갈층을 일부 굴착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아 地下水나 雨水도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호 집수지(3호 집석유구와 set)는 1호 집수지와 달리 방사상으로 뻗은 4개의 溝가 연결되어 있고, 溝의 비고차를 고려해 볼 때, 북서․ 남동쪽 3개의 溝를 통해 이곳으로 물이 흘러 들어와서 다시 남서쪽 溝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는 시스템을 보여 주고 있다. 溝 내부에는 자갈돌을 비롯해 상당량의 무문토기와 각종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溝와 集水池가 만나는 곳에는 의례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호 집석이 조성되어 있어 이 集水池가 水邊祭祀遺構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시설로서도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술하였듯이, 토기류의 절반은 단도마연토기이고, 석기류는 완성된 형태를 띠는 것은 2점 정도이며, 나머지는 모두 반제품석기이거나 격지들이다.
7) 竪穴遺構
竪穴遺構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깊이가 20cm내외, 직경 50cm를 넘지 않는 평면 원형과 장방형의 소형 유구들이다. 장방형 중에는 토광묘처럼 세장방형 형태로 토기 1점씩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이런 수혈유구의 특징은 소형이면서 그 출토유물은 다양하다는 점이다. 마제석검을 비롯해, 마제석촉, 단도마연토기, 지석, 무문토기 등 한두점의 유물만을 위한 시설처럼 보이는 유구들이다.
두번째는 깊이가 50cm이상이면서 단순히 타원형의 토광을 판 수혈로 토층상에서 별다른 특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수혈내에서는 무문토기편이 소량 보일뿐 별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그 성격은 알 수 없다.
세번째,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깝고, 깊이는 1m내외의 수혈이다. 이 유구의 특징은 우선
수혈을 판 다음 바닥 중간에 둑을 쌍아서 둑 양쪽에 작은 구덩이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흙이 퇴적되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폐기한 후, 다시 그 위에 둑을 쌓아 역시 양쪽에 구덩이를 만든 이러한 현상이 토층상에서 적게는 2회, 많게는 7~8회까지 계속되는데, 유구 내부에서는 극소수의 토기편이 간혹 보이고 별다른 시설이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수혈이 약 50여기 정도인데, 이 역시 성격은 불명이다.
8) 耕作地
경작지는 당시 문화층이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약간 낮아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적 북쪽의 유구들에 비해 후대교란으로 인한 파괴가 훨씬 적다. 따라서 유구 또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경작지는 구에 의해서 구획된 단위를 가리키는데, 그 면적은 작게는 10평 내외에서 크게는 수백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경작지내에서는 이랑과 같은 흔적이 일부 보이고 있으나,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경작의 흔적일 뿐이고 당시 구지표가 삭평된 관계로 논 또는 밭의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경작지는 유적의 남서쪽에 넓게
입지하고 있으며, 경작단위 또한 방형, 장방형, 삼각형 등 대체로 기획성이 엿보인다. 경작지는 일부 원형주거지와 중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원형주거지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거나 이른 시기의 원형주거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9) 우물(石造)
청동기 시대의 소형우물로서 모두 4기가 확인되었다. 우물은 대체로 주거군의 약간 바깥쪽 또는 경작지내(?)에 2개가 set를 이루며 설치되어 있다. 우물의 평면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이다. 1, 2호 우물은 서로 2m의 거리를 두고 조성되었는데, 깊이 1m내외의 수혈을 이단굴광으로 판 다음, 단이 진 부분에 강돌을 3~4단이상 쌓아서 구축하였다. 우물바닥은 기반층인 자갈층 상면까지 굴착한 것으로 보아, 지하수가 고일수 있게 한 것으로 판단된다. 작은 규모로서 위치 등을 고려해볼 때, 식수 또는 작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우물내부바닥에서는 무문토기편이 일부 출토되었다.
Ⅳ. 調査成果 및 意義
가. 칠곡 동천동 마을유적은 청동기시대 중기 전반에 조성된 생활유적으로서, 주거유구와 분묘유구, 경작유구등이 함께 조성된 복합유적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소위 ‘송국리형주거지’라고 하는 주거형과 유사한 주거지가 다수 조사되어 당시 남한지역의 문화교류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 청동기시대의 의례행위와 관계되는 水邊祭祀遺構가 확인되었고, 제사유구 주변에서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가 파쇄․산재되어 있어 이를 통해 당시의 의레행위 등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라. 청동기시대의 수혈주거지뿐만 아니라 굴립주건물지가 다수 확인되었고 그 규모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창고 역할만이 아니라 주거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 국내 최초의 청동기시대 우물이 확인되어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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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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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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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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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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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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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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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석관묘 석촉 출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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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석관묘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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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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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굴립주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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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집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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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집수지 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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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수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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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수혈 출토 석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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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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