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文化財硏究院現場說明會資料 49
문경 국군체육부대 이전부지 내(3구역) 유적
傳 烏井寺址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 유적위치:경북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 445번지 일원
▣ 조사기간:1구역 발굴-2009년 9월 7일~2010년 10월 26일(착수일로부터 187일)
3구역 발굴-2010년 12월 23일~2011년 5월 8일(착수일로부터 139일)
▣ 조사면적:5,107㎡(현상보존면적:3,983㎡)
▣ 조사기관:(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이희준)
▣ 조사의뢰기관:한국토지주택공사 위례사업본부
Ⅱ. 遺蹟의 立地와 考古學的環境
조사대상지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견타리 445번지 일원으로 烏井山의 남사면의중앙 부근에 위치한다. 조사대상지역이 위치한 문경은 영남지방의 북서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의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온 소백산맥의 중앙부에 속하는 험준한 지역으로 동북부는 험준한산악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분지상의 적지를 이루고 있고 동남부는 석회암지역으로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조사대상지역인 犬灘里는 3번 국도와 34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의 북서쪽 일대로 민가를 제외한 경작지와 산지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조상대상지역은 烏井山(해발 810m)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능선말단부 지역으로,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굽이쳐 영강이 흐른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 조사대상지역의 북쪽에는 烏井山이 위치하고, 영강 건너 서쪽으로 姑父山이 있는 魚龍山(해발 610m)이 위치한다. 남쪽 500m 정도 떨어져 영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다 야트막한 구릉으로 인해 남쪽으로 진로를 바꿔 흘러간다.
이번 발굴조사대상지인 3구역(傳烏井寺址)은 해발 810m인 烏井山남쪽 능선 말단부의 비교적 완만한 곡부 해발 160~180m에 위치한다. 이곳은 犬灘2里(태봉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북쪽부분은 최근까지 사슴농장으로, 남쪽부분은 감나무 밭으로 이용되었다. 일제감정기에 제작된 지형도에는 이곳에서 민가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원지형의 변형은 근래에 와서 이뤄졌다.
문경지역에서의 구석기시대 후기~신석기시대의 흔적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산양면 반곡리 주변일대 출토 슴베식타날화살촉과 점촌동‘창마마을’수습유물인 돌보습 등이 보고 되어 있다. 이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들은 영강 일대의 구릉지와 충적지에 위치하며 청동기시대에도 계승된다.
문경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지표조사된 가은읍 갈전리‘아차마을’지석묘를 비롯하여 문경읍 하리 및 요성리, 산양면 반곡리, 완장리, 점촌동‘창마마을’지석묘군과 용암읍 갈동리 농바위, 지동리 지석묘 및 입석 등이 개발의 현장 속에서도 현재까지 유존하고 있다.
문경지역이 기록상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三國史記』권2 아달라니사금 3년조에 보이는“夏四月 開鷄立嶺路”이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신라가 한강 유역과의 교역로를 열었다는 의미, 경주에서 계립령까지 이르는 길을 개척했다는 의미, 신라가 계립령의 위치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비약적인 팽창으로 인하여 상주·문경지역은 늦어도 5세기까지는 신라의 지방지배체제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시에 경주에서 이곳에 이르는 관도와 郵驛의 정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라의 지방지배체제 편입이후 이곳에서는 관문현, 가해현, 호측현 등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이들은 각각 관산현, 가선현, 호계현 등으로 개명되어 古寧郡의 속현이 되었다. 이때 산양면 일대는 嘉猷縣으로 예천군에 속해 있었다. 후삼국시기에는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자 이 지역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나, 뒤이은 후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으로 문경현이 되었고, 상주 소속의 호계현이 이관되었다. 8도체제가 정비되면서 신구 경상도관찰사의 교대 장소인 交龜亭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조사대상지역의 남쪽으로 견탄리 유물산포지1이 있으며, 북서쪽 1.8㎞ 떨어진 곳에는 신현리 고모산성과 신현리 석현성, 신현리고분군2, 3, 4, 신현리 유물산포지1, 신현리 주막거리유적 등이 분포하고 있다. 신현리 석현성이 끝나는 지점부터 호계면 견탄리의 견탄보까지 이어지는 구 영남대로상에는 신현리 兎遷이 현재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예고 되어 있는 상태이다.
영강을 지나 남서쪽 1㎞정도 떨어진 곳에는 신현리 고부산성이 위치하며, 남쪽 8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점촌4동 유물산포지8, 점촌4동 현감최두명청덕애민비, 점촌4동 현감김병선영세불망비가 위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원우조에는 조사대상지역이 위치하는 견탄리에 조선시대 여행의 편의를제공하는 시설인 원(院)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대상지인 3구역 남쪽에 위치하는 태봉의 정상부에는 조선시대 왕자의 태실, 북쪽 산기슭에는 가마터가 유존하고 있다.
Ⅲ. 調査方法및 層位
1. 조사방법
발굴조사 대상지역은 최근까지 과수원ㆍ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정산 남쪽 능선의 비교적 완만한 곡부에 해당되는 곳으로, 계단상 입지를 띠고 있다. 조사는 우선 기존남-북 방향을 기준으로 설치된 시굴트렌치를 기준으로 20m 간격의 그리드를 설정하려고 하였으나, 시굴조사 당시 확인된 석렬 및 기타 유구들의 방향을 고려할 때 가람의 추정 축선(N-15°-E)을 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그리드를 설정하였다. 유구가 확인된 시굴트렌치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유구가 확인된 유구의 상면까지 전면 제토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조사의 진행은 유적의 가장 북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그리드의 순번을 주어 16개의 Grid를 설정하였다. 조사 진행 순서는 조사대상지역내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북서쪽의 1Grid부터 제토를 실시하였다.
2. 층위
조사대상지역의 유적의 북쪽에 위치한 적심건물지 2호의 남-북 토층을 살펴 볼 때 층위는 크게 5개 층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상부부터 ①표토(교란)층 → ②암(흑)갈색사질점토층:현재 지표면에서 확인되는 건축물들이 확인되는 층으로 다량의 기와편들과 소토알갱이 들이 포함. ③적갈색사질점토층과+할석(적석)층, ④적갈색사질점토층으로 적심건물지 2호 내부토로 점성과 굳기가 강함. ⑤생토층(기반층)인 회황갈색사질점토+다량의 할석(직경10~15㎝)이 포함된 층이 확인된다. 층위에 대한 세부 설명은 표 1과 같다.
Ⅳ. 調査內容
1. 遺構
조사지역에서는 통일신라~조선시대 적심건물지 9동과 대형 축대 6기, 우물 1기, 부속시설 8기, 수혈 2기가 확인되고 있다.
조사대상지역은 근대에는 밭으로 이용되다가 약 10여년 전 사슴목장 및 우사로 사용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현재 발굴조사된 범위의 대부분은 지표면을 중장비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적심건물지 및 축대, 부속시설 등의 유구 축조시 사용된 석재들이 원 위치에서 이탈되는 등 상당부분 유실된상태였다. 또 조사대상지의 서쪽은 산사면을 약 7m정도로 삭평하여 원지형이 사라진 상태이다.
이번 발굴조사된 유적은 크게 4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북쪽의 비교적 편평한 지역의 적심건물지 1~4호가 위치한 곳(1~4G), 두 번째 조사대상지역 동쪽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가지면서 배치된 적심건물지 5 → 9호가 위치한 곳(8G, 11G, 14G, 16G), 세 번째 조사대상지역의 중앙부 경사면에 위치한 부속시설 및 축대 등이 위치한곳(5~7G), 네 번째 조사대상지역 중앙 남쪽 축대 1, 2호가 위치한 곳(9G, 10G, 12G, 13G, 15G)으로 비교적 편평한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사대상지 내에서 확인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볼 때 조사대상지역의 건물지 성격은 寺址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寺域에서 확인된 적심건물지와 기타 부속시설에서 확인되는 다량의 석재들은 모두 정교하게 다듬지 않고 부분적으로 치석한 할석을 사용하였다.
발굴조사된 사역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조선시대 후기까지 유존하였던 사찰로 추정되며, 창건 및 중건의 흔적들이 확인된다.
유적의 표준 토층인 적심건물지 2호 남-북 토층과 5Grid 서쪽 조사경계부근의 교란지점에서 확인된 축대 4~6호 단면에서 창건과 중건을 한 양상이 나타난다. 적심건물지 2호 남-북 토층의 경우 창건기 당시로 추정되는 2호 적심건물지관련 층과 중건기 층이 확인된다. 또 상부에 내부토 양상이 확연하게 틀린 암(흑)갈색 사질점토와 다량의 유물이 포함된층을 굴착하고 축조된 석렬이 확인된다. 또 5Grid 서쪽 조사경계부근의 교란에서 확인되는 3기의 축대를 보면 창건기 당시로 추정되는 길이 1.5m 폭 80㎝정도의 대형 할석을 이용한 축대가 확인된다. 다시 남쪽 약 1.5m정도 앞에서 추정‘廣林寺’의 중건기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축대가 확인된다. 이때 창건 당시의 축대 상부에 40㎝내외의 비교적 큰 할석들을 깔거나 매우고 다시 상부에 적갈색사질점토를 깔아서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지표면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추정‘廣林寺’의 중건기 축대 남쪽 1.5m정도에 또 하나의 축대가 축조되어 있다.
위 두 지점의 공통적인 양상을 보면 창건기 당시로 파악되는 적심건물지 및 축대 내부토는 적갈색 사질점토에 이물질이 거의 없다. 그리고 추정‘廣林寺의 중건기 당시 내부토는 비교적 큰 할석을 이용하여 사역을 넓히거나 정지하고 적갈색 사질점토를 이용해서 상부를 마감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 두시기의 층에서 적갈색사질점토가 주를 이루며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중건기 이후에 축조된 건물지의 토층 양상은 이전의 적갈색사질점토가 대부분인 것과는 확연히 다른 흑(암)갈색 사질점토에 다량의 유물들과 함께 비교적 작은 할석이 포함된 양상을 띤다. 이는 다시 한번 중건 되었다기 보다 창건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문헌기록과 고지도에는 조사대상지역에 해당하는 곳에‘烏井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유적에서 출토되는‘廣林寺’명 기와를 통해 볼 때 창건되어 중건된이후 폐사되기 전까지‘廣林寺’라는 사찰명을 쓰다가 폐사된 이후‘廣林寺’터에 다시‘烏井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평면상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로 추정된는 추정‘廣林寺’창건기의 정확한 범위는 알기 어려우나 대략 범위는 적심건물지 2호와 그 북쪽의 형상보존된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중건기의 특징인 비교적 큰 할석과 절갈색 사질점토층이 확인되는 범위를 파악한다면 적심건물지 3, 4호남쪽 끝부분과 1차 중건기 축대로 보여지는 5호 축대 부분까지일 것으로 보여진다. 그 범위는 2호건물지와 수평이면서 약20m 폭으로 확장하였다. 또 축대 1, 2호 단면 토층에서도 대형할석을 깔고 그 상부에 적갈색사질점토를 깐 양상이 확인되는 점을 볼 때 추정‘廣林寺중건기 당시 현재의 사역이 대략적으로 정비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후‘傳烏井寺址’가 창겅될 당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는 유구는 적심건물지 1~4호를 비롯해 조사경계 동쪽 사면의 5~9호 건물지들과 부속시설 4~8호 정도가 축조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일 예로 적심건물지 1~4호와 부속시설 1~3호는 적갈색사질 점토를 내부토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적심건물지 5~9호와 부속시설 4~8호는 대체적으로 흑(암)갈색사질점토가 건물지 내부서 확인되거나 흑(암)갈색사질점토층 또는 생토층위에 성토(판축)하지않고 바로 건물지를 축조한 형태를 띤다. 이 흑(암)갈색 사질점토는 적심건물지 2호 남-북토층상에서 확인된 중건기 이후에 형성된 토층양상과 동일하다.
조사대상지내에서 확인된 적심건물지들은 대부분 건물지의 전체가 확인된 것이 아니라 1/2 또는 1/4정도만 확인된 상태이며, 대부분 조사경계 밖으로 유구가 확장되어 유존하고 있다. 그리고 부속 시설들은 대부분 유구의 상부에 할석들과 유물들로 덥혀 있어 그 정확한 양상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유구들에 대한 세부내용을‘傳 烏井寺址’와 추정‘廣林寺’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
가) 傳 烏井寺址
(1) 적심건물지
(가) 적심건물지 1~4호
유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조사대상지의 북쪽 부분(1~4Grid)으로 최근까지 사슴목장으로 이용되어 평면 제토시 교란 범위가 상당히 넓게 분포하고 있어 적심건물지의 상부가 상당 부분 교란되었다. 하지만 적심 적심건물지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단부 및 초석, 적심, 온돌시설 등이 확인되고 있어 그 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적심건물지 1~3호는 유적의 중앙부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는 168.5m정도에 위치한다. 적심건물지 1~3호는 대체적으로‘ㄷ’자형 배치를 띠고있으며, 모두 지표토의 약 5~10㎝정도 아래 흑(암)갈색 사질점토 또는 황갈색사질점토층에서 확인된다.
적심건물지 1~3호는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며 유구의 전체가 조사되지 않아 유구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건물지의 평면형태와 초석 및 적심을 볼 때 증축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일부 확인된다. 이는 ‘廣林寺’라는 사찰명으로 있던 시기 이후‘烏井寺’라는 사찰이 다시 창건될 당시‘廣林寺’당시의 건물지 기초를 이용하여 다시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다.
① 적심건물지 1호
적심건물지 1호는 적심건물지 2호의 서쪽에 인접해서 위치한다. 건물지는 지표에서 바로 확인되었으며, 서쪽과 북쪽 조사경계 밖으로도 건물지가 확장되고 있다. 적심건물지 1호는 동향(N-13°-E)에 가까우며 평면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기단부가 동쪽과 남쪽으로 1열이 잔존하고 있으며, 건물지 내부에는 온돌시설 및‘ㄷ’자형시설물, 적심, 초석 등이 확인되고 남쪽 기단으로 인접해서 배수(암거)시설이 확인된다. 건물지 잔존 규모는 정면 (현)2,1200㎝×측면(현)1,160㎝이며, 기단의 폭은40~130㎝정도 이다. 적심건물지 1호 북동쪽 기단의 바깥쪽으로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기단은 현재 동쪽 즉 건물지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1단이 잔존하고 있으며, 할석을 사용하여 1~2열로 축조하였으며, 외면 또는 내·외면을 정면하였다. 동쪽 기단 외면에는 10㎝ 내외의 작은 할석들과 소량의 유물들이 깔려져 있는데 이는 낙수시설로 추정되며, 남쪽 기단 외면에 인접해 있는 배수시설과 연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거시설은 서쪽 조사경계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다. 배수시설은 진행방향은 동→서 방향이다. 양 장벽은 30~40㎝정도의 할석으로 와수적하고 그 위에 비교적 편평한 할석을 덮어서 축조하였다. 출토유물로는 다수의 암막새, 수키와, 암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다.
② 적심건물지 2호
적심건물지 2호는 조사대상지역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며 남향이면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지로 현재 조사 중에 있다. 건물지의 동쪽과 북쪽으로는 조사경계 밖으로도 유구가 진행하고 있어 조사경계 외곽으로 건물지가 유존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주축방향이 서향인 적심건물지 3호와 동향인 적심건물지 1호가 위치한다. 남향(N-75°-E)의 건물로 평면형태 장방형이다.
기단부가 남쪽으로 1열이 잔존하고 있으며, 건물지 내부에는‘ㄷ’자형시설물, 적심, 초석 등이 확인된다. 기단은 현재 남쪽 즉 건물지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2~3단이 잔존하고 있으며, 할석을 사용하여 1~2열로 축조하였으며, 내·외면 또는 외면을 정면 하였다. 석축 기단의 남쪽 평면형태는 중앙이 약간 돌출된 형태이다.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현)4,460㎝×측면(현)580㎝이며, 기단의 폭은 100~150㎝정도 이다. 배수(암거)시설 및 낙수시설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건물지 기단 남쪽으로 와적층이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적심건물지 2호는 기단 내부를 적갈색사질점토를 이용하여 판축기법으로 성토하여 건물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석축의 최하단석은 생토층(기반층)인 회황색사질점토+자갈층 상면에 확인된다. 이런 양상으로 적심건물지의 축조 순서를 추정해 보면, 기반(생토)층을 ‘L’자 형태로 절토 후, 적갈색사질점토를 다지고 기단을 축조하였다. 기단을 축조할 때 기와편과 10~15㎝정도의 할석이 포함된 갈색사질점토를 기단의 내·외부에 충전 한 후 건물의 적심과 초석, 기타 부속시설 등을 설치하였다.
출토유물로는 암막새, 청자편, 수키와, 암키와 등이 출토되었다.
③ 적심건물지 3호
적심건물지 1호는 서향(N-16°-E)에 가까우며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현재 조사경계 동편과 북편 밖으로 건물지가 확장되고 있다. 남-북 방향의 기단이 서쪽으로 1열이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 조사중에 있다. 건물지 내·외부에는 상부 교란이 심하여 건물지 내부의 온돌시설 및 적심, 초석 등과 같은 시설은 확인 되지 않는다. 기단은 현재 서쪽 즉 건물지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1단이 잔존하고 있으며, 할석을 사용하여 1열로 축조하였으며, 외면을 정면하였다. 잔존 규모는 정면 (현)2,480㎝×측면 (현)880㎝정도 이다. 기단의 서쪽 외곽 약 150㎝ 떨어진 곳에 초석 6개가 동-서방향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주칸 거리는 약 230~300㎝정도이다. 3호 건물지와 관련된 시설(출입구)로 추정된다. 확인된 기단 석축의 최하단석은 생토층(기반층)인 회황색사질점토+자갈층 상면에서 확인된다. 출토유물로는 다량의 수키와, 암키와 등이 노출되었다.
④ 적심건물지 5~8호
적심건물지 5~8호는 모두 동쪽 조사경계 밖으로 건물지가 확장되고 있다. 이 건물지들은 적심건물지 1~3호와는 조금씩 다른 배치를 보이고 있다. 5호 건물지는 3호 건물지보다 약 1m정도 높은곳에 위치한다. 5호 건물지부터 6호와 7호, 8호 건물지는 모두 북→남으로 열을 지어 인접해서 배치되어 있다. 적심건물지 5~8호는 북→남으로 높이가 조금씩 낮게 축조되었으며, 이 건물지들의 축조는 동시 축조보다는 대략적으로 북→남으로 내려오면서 축조되었다. 건물지 내부에 온돌시설 또는 초석, 적심, 기단석축 등이 확인된다. 건물지 5~8호는 서향또는 남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축대 및 사지관련 기타 부속시설
① 축대 2호
축대 2호는 현재 조사중에 있으며, 축대 1호 이후에 축조되었다. 축대 1, 2호는 13G와 15G에 걸쳐서 확인되고 평면형태는‘ㄱ’자형으로 추정된다. 축대는 조사대상지역 서쪽의 소하천과 접해 있는 부분만 축조하였다. 축대 2호는 1호보다 약 2m정도 서쪽 소하천 밖에 축조되었으며, 축대의 외면은 1호에 비해 정연하지 않고 축대의 높이도 현재 약 40㎝ 정도로 작다. 축대 내부토는 유적 표준 층위에서‘傳烏井寺址‘ 창건기로 추정되는 층위와 동일한 양상이다.
② 축대 6호
적심건물지 1호의 남편 경사면에 위치하며, 주축방향은 동-서이다. 축대 6호는 축대 4호와 5호의 남쪽에 축조되었으며, 축조 순서는 4호→5호→6호 순으로 축조되었다. 축대의 규모는 길이 (현)3,560㎝, 폭 (현)1,160㎝, 높이 (현)320㎝정도이다. 축대는 현재 6단 정도가 남아있으며, 단면 형태는 북→남으로 낮아져 계단 형태로 축조 되었다. 석재는 30~40㎝정도의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축대 내면에는 흑(암)갈색사질점토와 함께 다량의 할석이 채워져 있으며, 축대 남쪽 외면에는 다수의 기와가 포함되어 있다. 출토 유물은 막새편과 기와편과 자기편이다.
③ 부속시설 4~8호
적심건물지 및 축대 이외에도 사지관련 부속시설이 5~8G 및 13~16G에서 8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사슴농장신축으로 상부 교란이 심하여 조사가 좀 더 진척되어야 유구 성격이 정확히 밝혀질 것이다. 대체적인 축조 위치와 내부토 양상, 내부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부속시설 4~8호는‘傳 烏井寺址’가 창건될 당시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 추정 ‘廣林寺’
(1) 적심건물지 1~4호
적심건물지 1~4호는 고려시대 중기의 추정 ‘廣林寺’ 중건기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는 적심건물지 상부에 축조되었다. 이 건물지들은‘廣林寺’이후‘烏井寺’라는 사찰이 다시 창건될 당시 ‘廣林寺’의 건물지 기초를 상당 부분 그대로 이용하여 다시 축조되었으며, 현재 조사 중이다.
① 적심건물지 2호
적심건물지 2호의 경우 출토유물로는 다수의 암막새, 청자편, 수키와, 암키와 등이 출토되었으며 적심건물지 2호의 중앙 기단부에서 금동불상 7점이 출토되었다. 금동불상 7점이 출토된 지점은 동-서 기단 중앙부의 돌출부에서도 중앙에 해당하며, 기단 축조 당시 기단 내부에 부장한 진단구와 같은 의례용도의 매납 유물로 판단된다. 불상 7점은 모두 약 1m 반경 내에서 출토되었다. 불상 7점은 기단 석축부분에서 1점과 남쪽으로 무너져 내린 기단 석재들 사이에서 6점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양상은 추정 ‘廣林寺’가 폐찰 된 이후 오랜 시간 방치되다가 축대가 흐트러졌거나 ‘傳烏井寺’가 축조되면서 불상이 흐트러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금동불상은 일반적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적심건물지 2호는 추정 ‘廣林寺’ 창건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축대 1호
축대 1호는 축대 2호 보다 선축되었으며, 2호 보다 동쪽에 위치한다. 축대 하단부는 30~40㎝내외의 할석을 이용하여 쌓다가 최상부에는 40~80㎝정도의 비교적 큰 할석을 이요하여 마감하였다. 축대 1호의 규모는 현재 길이 5,720㎝, 높이 최대 150㎝ 정도이다. 축대 1호는 부석군 상부의 적갈색사질점토층 상부에 축조되었다. 축조 순서를 보면 아래부터 생토층인 회황색사질점토+자갈층 상부에 30~40㎝내외의 할석이 적석된 층과 그 상부에 점성이 강한 적갈색사질점토(추정‘廣林寺’중건기층)를 깔았다. 그리고 그 상부에 할석을 이용해 축대를 쌓고 축대 내부에는 다수의 기와편과 자기편, 자갈이 포함된 암갈색사질점토층과 할석층, 최상부에는 적갈색사질점토를 번갈아 성토하였다.
최상부의 적갈색 사질점토층의 두께는 비교적 얇게 나타나며, 범위는 넓게 확인된다.
(3) 축대 4, 5호
축대 4, 5호는 6호와 마찬가지로 적심건물지 1호의 남편 경사면에 위치하며, 주축방향은 동-서이다. 축대의 규모는 현재 일부만 노출된 상태여서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석재들은 축대 6호보다 큰 100~150㎝정도의 할석을 주로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비교적 정연한 형태로 확인된다. 축대 4호의 경우 내면에는 소량의 할석과 함께 적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져 있으며, 축대 5호의 경우 내면에는 20~40㎝내외의 비교적 큰 할석이 채워져 있고 그 상면은 적갈색 사질점토로 정지한 양상으로 추정‘광림사’의 중건 당시에 형성된 층으로 파악된다. 내부에서 연화문수막새와 ‘大平’ 명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3) 부속시설 1~3호
현재 조사 중이며, 전체적으로 건물지 배치와 층위 양상,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추정 ‘廣林寺’와 관련된 시설로 판단된다.
2. 遺物
현재까지 건물지 내부에서 금동불상 7점을 포함하여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 명문 기와, 암수막새, 전돌 등 약 250여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향후 조사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유물이 다수 출토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토유물 중 유적의 성격과 존속 시기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출토유물 중 본 유적이 사지임을 밝혀주는 중요 유물로 적심건물지 2호의 진단구의 양상으로 출토된 금동불상 7점이 있다. 대체적으로 불상들의 부식 정도는 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금동여래입상 4점, 금동보살입상 1점, 그 외 결실이 심해 형태를 추정하기 어려운 금동불상 2점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 유적에서 금동불상이 최대로 출토된 곳은 숙수사지에서 25점이 출토되었을 뿐, 그 외 사지에는 1~3점이 출토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 유적처럼 동일 지점에서 7점이 동시에 출토된 유적의 예는 드물다. 금동불상 중 2점은 대좌와 함께 주조되었다. 불상 중 일부는 뒷면에 꼭지가 있어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후대 교란으로 유실되었거나 또는 부식되어 확인되지 않았다. 금동불입상 4점은 모두 머리에 육계가 올려져 있다. 그 중 1점은 나발이 선명하지만 육계가 비교적 약하게 표현되어 있다. 불상은 2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12㎝ 내외로 비교적 작은데, 호신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전체적인 외형을 알아 볼 수 있는 금동불입상 4점은 불상의 외형은 정교하고 신체의 양감이 풍부한 편이며 기존의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약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자기류는 고려 초기(10세기~11세기)로 편년되는 해무리굽 청자와 함께 중기 및 후기의 청자류가 출토된다. 조선시대 전기로 편년되는 분청사기편이 소량 확인되고 조선시대 중기 이후 17~18세기로 편년되는 백자도 출토된다.
기와류로는 고려시대 초기 및 중기로 편년되는 어골문·사격자문·복합문·집선문이 타날된 평기와가 확인되며, 고려시대 후기 또는 조선시대 전기에 유행한 평기와로 미구가 확인되면서 언강의내면 각도가 완만한 수키와와 함께 명문이 세겨진 기와도 출토되었다. 그 외 조사대상지 북서편 조사경계에 위치한 축대 3호 남편 와적부분에서 연화문 수막새와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연화문수막새 중 1점은 감은사지에서 출토되어 751~936으로 편년되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연화문수막새와 거의 동일한 유형이다. 또한 와적부분에서 출토된‘大平’銘암막새(망와)는‘大平’이 요나라 성종(1021~1031년)의 연호인‘大平’혹은‘太平’과 일치하므로 명문 암막새(망와)는 고려 현종(992년~1031년) 상간으로 고려시대 초기로 편년된다.
본 유적은 ‘傳 烏井寺址’임은 문헌 및 고지도등에서 확인되지만 廣林寺에 대한 내용은 없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의 중복관계와 층위양상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축조된 사찰이 존재하였다고 판단되며, 유적에서 ‘廣林寺付’명 기와가 상당수 출토되는 점을 통해 볼 때,‘ 烏井寺’이전에 ‘廣林寺’라는 사찰이 존재했다고 판단된다.
Ⅴ. 調査成果및 意義
1. 이번 발굴조사는 문경 국군체육부대 이전부지 내 유적 중 3구역의‘傳 烏井寺址’및 추정‘廣林寺’의 寺域에 해당한다. 발굴조사 결과 적심건물지 9동을 비롯해 축대시설 6기, 부속시설 8기, 수혈2기 등 寺刹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 적심건물지 2호 남-북 토층과 축대 4~6호의 단면에서 확인되는 층위양상 및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傳 烏井寺址’와 관련된 유구는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던 추정‘廣林寺’의 사역 전체를 정비한 후 기존의 시설을 상당 부분 그대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적심건물지 2호 및 축대 2호, 6호에서 부분적으로 증축한양상이 확인된다. ‘傳烏井寺址’창건 당시에는 적심건물지 5~9호를 비롯해 부속시설 4~8호 등 일부 시설들을 추가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된‘傳 烏井寺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상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 고지도는 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海東地圖』의 聞慶縣圖와 18세기 중엽 제작된『嶺南地圖』의 聞慶縣圖, 19세기 전반에 제작된『廣與圖』의 聞慶縣로, ‘烏井寺’가 표기가 되어있으며 조사대상지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도면 6·7). ‘烏井寺’에 대한 문헌기록은 조선 초기 윤상(尹祥:1373년~1455년)의 시조과 서거정(徐居正:1420년~1488년)의 시조‘오정종루(烏井鐘樓)’와 김종직(金宗直:1431년~1492년)의 시조‘오정상종(烏井霜鐘)’등이 있다12). 본 유적이‘烏井山’남쪽 자락에 있는 점을 감안하고, ‘烏井鐘樓’의 시조를 살펴보면‘‘개울가 마을’,‘ 좁은 돌길 돌아서’등의 내용 있는데, 본 유적이 위치하는‘태봉마을’이 개울과 맞닿은 마을이란 점과 마을 북쪽에서 조사대상지에 이르는 길이 암반지대란 점을 통해 볼 때 본 유적에서 확인된 사지는‘傳烏井寺址’로 판단된다.
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중 17~18세기로 편년되는 조선시대 자기가 확인되는 점은‘傳 烏井寺址’가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재하였던 것을 말해 준다. 그 외 문헌자료는 고지도와 함께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龍巖寺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龍巖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 복장 개봉시 확인된 다라니경에 의하면 1651년 문경‘烏井寺’에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 개봉 시기가 1880년인 점과 오정사라는 표기가 있는 19세기 전반 고지도 등을 통해 볼 때 19세기 중반 즈음하여‘傳 烏井寺址’가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도면 6·7, 사진 15).
‘傳 烏井寺址’의 창건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 내용은 없지만, 조선시대 초 권근(權近)의 犬灘院記에 ‘지금은 퇴락한지 오래되었고 화엄대사 진공이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추정 ‘廣林寺’ 당시 부속된 院址에 조선시대 초기에 다시 조성되었다는 犬灘院의 문헌 자료가 확인된다. 이러한 것은 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층위양상을 통해 볼 때 조선시대 초기 이전 즉 고려시대 후기~조선시대 초기에 추정 ‘廣林寺付’에 부속된 院이 퇴락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견탄원이 축조된 이후 현재 발굴조사된 ‘傳 烏井寺址’가 다시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조사대상지 내 적심건물지 1~4호 주변 상부에서 주로 출토된 명문 기와 중 ‘廣林寺付’명 기와는 비교적 다수 확인되고 있는데, ‘廣林寺’는 조선시대의 문헌 및 고지도 등 기록에 없고‘傳 烏井寺址’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은 적심건물지 2호의 층위 양상과 기단 석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들, 축대 1, 2, 4, 5, 6호의 단면 양상, 축대 주변 주변에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연화문수막새, 고려시대 귀목문수막새등을 통해 볼 때, ‘傳 烏井寺址’이전에 통일신라시대 후기~고려시대 중(후)기에‘廣林寺’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층위 조사결과, 추정 ‘廣林寺’의 가장 번성하였던 중심 년대는 사역이 중건된 시기로 보여지며 중건기로 판단되는 층에서 확인되는 귀목문 수막새와 주변에 다수 확인되는 청자편 등을 볼 때 고려시대 초~중기(11세기말~13세기)정도로 보여진다. 그리고 현재 14세기부터 청자들이 보이지 않는 점은 추정‘廣林寺’가 13세기 후반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犬灘院’으로 추정되는 院址19)유적은‘廣林’이란 명문 기와 및 암기와에 타날된 문양이 본 유적에서 출토되는 기와에 동일한 점을 통해 볼 때 추정 ‘廣林寺’ 및 ‘傳烏井寺’의 院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3. 출토유물 중 본 유적이 사지임을 밝혀주는 중요 유물로 적심건물지 2호의 진단구의 양상으로 출토된 금동불상 7점이 있다. 금동여래입상 4점, 금동보살입상 1점, 그 외 결실이 심해 형태를 추정하기 어려운 금동불상 2점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 유적에서 금동불상이 최대로 출토된 곳은 숙수사지에서 25점이 출토되었을 뿐, 그 외 사지에는 1~3점이 출토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 유적처럼 동일 지점에서 7점이 동시에 출토된 유적의 예는 드물다.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여래보살상 등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동불상 7점은 향후 한국 불교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4. 유적 내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들을 살펴 볼 때‘傳 烏井寺址’와 추정 ‘廣林寺’의 伽藍의 중심 축선은 정 남-북에서 동쪽으로 15°기울어진 상태인데, 이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산지가람의 특성으로 판단된다. 조사된 사역의 伽藍배치는 현재까지 조사된 유구의 규모와 배치 양상, 출토유물 등을 볼때 조사경계 북쪽의 현상보존지역과 적심건물지 2호가 중심 유구로 판단되며, 적심건물지 2호는 배치 상태나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金堂(大雄殿)과 같은 중심시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 건물지 들은 현재로서는 佛殿·閣·僧堂·樓·門등과 함께 기타 부속시설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만 추정된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상황을 통해 볼 때 추정‘광림사’창건 당시에는 발굴조사 경계 북쪽 현상보존지역부터 남쪽의 축대 4호와 건물지 3호를 연결하는 동서 범위까지 축조하여 사용하다가 중건 당시에는 적심건물지와 부속시설이 증축되면서 축대 1호가 위치한 곳까지 사역의 범위가 확장되어지고 고려후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전 오정사지’가 다시 조선시대 초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후기에 폐사되기 까지 사역 내에 증·개축이 계속해서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전체적인 사역의 평면형태는 ‘∩’자형이다. 傳 烏井寺범위는 현재 발굴조사 상황을 통해 볼 때 동쪽과 서쪽, 북쪽의 발굴조사 범위 밖으로 건물지 유구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사역의 범위는 북쪽으로 현재 현상보존지역 범위를 포함하고, 동쪽과 서쪽으로 현재 지표에 폭 2m정도 남-북으로 확인되는 적석의 양상이 당시의 외곽 담장으로 추정되고 동쪽과 서쪽의 경계 범위는 적석이 확인되는 범위까지로 보인다. 남쪽 범위는 건물지가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 범위로 보면, 전 오정사지의 범위는 대략 남-북 140m, 동-서 100m정도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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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1~3호 조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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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 위치 및 주변유적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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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대상지역 원경(상) 및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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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대상지역 및 주변 조사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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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 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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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역 표준 층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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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역 표준 층위-건물지 2호 남북 토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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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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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역 유구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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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1~3호전경 및 적심건물지 2호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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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 4,5,6호 전경 및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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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2호전경 및 금동불상 노출상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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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 2호 금동불상 노출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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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지 2호 금동불상 노출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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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2호 출토 금동불상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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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2호 출토 금동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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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2호 출토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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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심건물지 2호 출토 금동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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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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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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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대상지역 유구배치 및 유적 확장범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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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1750년대 초반 , 하:18세기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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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문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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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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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광림사 및 전 오정사지 추정 존속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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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및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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