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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주 덕천리유적 현장설명회 보도자료 배포
작성자 영남문화재(ynicp)  (211.107.125.77)     작성날짜 2005-12-07 00:00:00     조회수 1431  

경부고속철도 경주 덕천리 건설구간내
慶州 德泉里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1. 유적 위치:경북 경주시 내남면 덕천 2리 484-2일원
2. 조사 목적:이번 조사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시행하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에 따른 형질변경이 예상되는 곳으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취락유적, 원삼국시대 분묘유적, 삼국시대 제철관련유적 등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명확한 성격을 파악하고, 향후 유적의 보존․보호대책의 수립과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상를 밝히기 위한 고고학적 학술자료를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3. 조사 기간:2004년 6월 18일~2006년 9월 11일(816일간)
4. 조사 면적 : 35,320㎡
5. 조사 기관 : (財) 嶺南文化財硏究院(원장 : 이백규)
6. 조사의뢰기관 : 한국철도시설공단


Ⅱ. 調査經過

경주 덕천리Ⅰ유적 조사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추진하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에 따른 형질변경에 앞서 영남문화재연구원과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으로 1996년 10월 17일~1996년 12월 4일에 걸쳐, 경주 경유구간 68㎞의 3개 노선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새로 선정한 제 4안(화천리노선)에 대하여 1997년 1월 6일~1997년 1월 11일까지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추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경주 경유구간에서 송선리, 방내리, 화천리, 화곡리, 덕천리, 월산리, 활천리 등 총 7개구간에서 유적의 분포가 확인되었다. 이에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원삼국시대의 분묘, 삼국시대 제철공방지, 조선시대 생활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4년 6월 18일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에 있다. 2004년 10월 29일에 덕천리Ⅰ유적의 6개 구역 중 5구역에 대한 유적의 보존․보호와 관련한 처리문제, 향후 유적 조사방향에 대한 문제를 두고 1차 지도위원회가 개최된 바 있다.

Ⅲ. 調査內容

1. 遺構
경주 덕천리Ⅰ유적은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조선시대 등 여러시대에 걸쳐서 다양한 유구가 형성된 복합유적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수혈주거지 9동과 석관묘 1기, 원삼국시대 목곽묘 80기, 옹관묘 50기, 불명유구 12기 토기매납유구 8기, 수혈유구 2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 유구는 수혈유구 6기, 구 1기, 유물포함층 1개소, 습지 1개소, 굴립주건물지 1동, 토기매납유구 2기 등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도로유구 3기가 확인되었으며, 조선시대 유구는 수혈 11기, 구 4기, 굴립주건물지 2동과 다수의 주혈이 확인되었다.
1) 靑銅器時代
(1) 住居址
현재까지 본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구는 수혈주거지 9동이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조사구역의 남쪽(5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나 석관묘와 주거지가 북쪽의 2구역까지 확인되고 있어 취락의 범위는 조사구역 최남단과 최북단을 제외한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확장될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방형․말각방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장방형인 주거지로는 2호․7호․8호가 있으며, 방형은 1호․6호주거지, 말각방형으로는 9호주거지가 있다. 그 외 3호․4호․5호주거지는 삭평되어 평면형태를 알 수 없다. 장방형주거지의 규모는 길이 530~742㎝, 너비 338~357㎝이며, 방형과 말각방형주거지는 길이 275~438㎝, 너비225~314㎝이며 잔존깊이는 34㎝이하로 얕은 편이다. 규모는 2호 주거지가 가장 큰 대형에 속하며, 1호․9호주거지는 소형이다. 소형에 속하는 1호․9호주거지는 형태가 완전하지만 노지시설이 없으며 2호․8호주거지와 인접한 위치에 축조된 점을 통해 볼 때, 2호․8호주거지와 관련된 부속시설로 판단된다.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내부시설로는 주혈․노지가 있으며, 평지성취락으로 내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혈의 배치는 2호주거지를 제외하고는 주혈 배치상의 정형성을 보이지 않는다. 2호주거지는 장벽과 평행하게 등간격의 주주혈이 7개가 확인된다. 7호주거지의 경우, 벽 가장자리를 따라 직경 6~16㎝, 깊이 10㎝ 이하의 주혈이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노지는 3호․4호․5호․6호․8호주거지에서 확인되며, 모두 토광형노지이다. 노지의 평면형태는 원형․타원형․부정형이 있으며, 규모는 직경 50~115㎝, 깊이 5㎝로 단벽 쪽에 치우쳐 설치되어 있다. 상면처리는 2호․8호주거지의 경우, 바닥을 정지한 후 불다짐하였고, 그 외 주거지는 굴착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주거지의 폐기는 2호주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주거지는 내부토의 퇴적양상과 목탄의 검출양상을 통해 볼 때 자연폐기된 것으로 보이며, 2호주거지는 다량의 목탄과 함께 확인되는 소토를 통해 볼 때 화재로 인한 폐기로 판단된다.
유물은 홍도, 발, 호, 석검, 석도, 석촉과 미완성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2) 石棺墓
석관묘는 주거군의 북쪽에 치우쳐 위치한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158㎝, 단축 123㎝, 깊이 30㎝이며, 석관의 규모는 동단벽과 북장벽의 벽석일부가 탈락되어 명확치 않다. 축조는 길이 30~65㎝, 두께 10~20㎝의 판석을 이용하여 먼저 서단벽을 1매의 판석을 기준으로 남․북의 장벽을 3~4매의 판석을 세운 후, 묘광과 벽석사이에 10~15㎝의 천석과 흙으로 충진하였다. 바닥은 10~20㎝의 비교적 편평한 천석을 이용하여 3~4열로 깔았다. 유물은 바닥에서 홍도 1점, 석촉 3점, 미완성석검 2점이 출토되었다. 석관의 벽석과 내부에 다량으로 확인되는 돌에서 불맞은 흔적이 관찰되며 바닥에 목탄과 함께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는 점에서 화장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2) 原三國時代
본 유적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원삼국시대 유구는 분묘와 관련한 유구로써 목곽묘 80기, 옹관묘 50기, 토기매납유구 8기, 불명유구 12기, 수혈유구 2기 등 총 152기이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 유구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감안한다면 유구의 수는 증가될 것으로 판단되며, 예상유구수는 목곽묘 130기, 옹관묘 70기정도이다. 유구의 분포는 조사구역 최북단과 최남단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확인되며 지대가 조금 높은 가운데부분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다수의 무덤이 경지구획정리에 의한 삭평으로 상부토 제토과정에서 부장유물이 노출된다.
(1) 木槨墓
목곽묘는 현재까지 80기가 확인되었으며, 60기가 조사되었다. 대부분 조사구역 중앙에 밀집되어 조성되었다. 개별 무덤간의 시기차이는 약간씩 보이지만 중복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목곽의 평면형태는 거의 장방형을 띠며 일부 세장방형인 것도 확인된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194~520㎝, 단축 92~220㎝이다. 목곽의 주축방향은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하며 약간씩 남북으로 틀어진다. 두향은 모든 목곽묘에서 경식이 출토되진 않았지만 경식이 출토된 목곽묘를 통해 볼 때 모두 동향으로 판단된다. 부장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로 나눌 수 있으며, 토기는 대부분 서단벽쪽(발치쪽)에 부장되며 장벽의 가장자리 또는 두향인 동단벽에 부장되기도 한다. 토기는 와질이며 단경호, (유개)대부광구호, (유개)대부직구호, (유개)노형토기, 고배, 양이부호, 발, 파수부호, 개가 주를 이루며, 소수에 불과하지만 오리모양토기, 신선로형토기가 공반되어 출토되기도 한다. 철기는 철모, 철부, 철겸, 따비, 철촉, 환두대도, 철착, 판상철부, 도자 등이 출토되었는데, 유물별 부장위치를 살펴보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철모는 무덤의 단축과 평행 또는 직교되게 목곽 가장자리에 부장되거나 시신 아래에 깔고 있다. 철부, 철촉, 철겸, 따비의 부장은 시신을 중심으로 머리, 허리, 발 등 다양한 위치에서 출토된다. 철부, 철겸, 따비는 3점이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장신구는 수정제곡옥, 수정제다면옥, 마노제다면옥, 유리제환옥으로 구성된 경식이 주를 이루는데, 15호묘와 24호묘에서는 금박샌드위치구슬이 출토되기도 한다.
(2) 甕棺墓
옹관묘는 현재까지 50기가 확인되었으며, 40기가 조사되었다. 옹관의 분포는 목곽묘 사이에 고르게 확인되며 봉토가 남아있지 않아 단정지울 수 없지만 목곽과 옹관이 인접한 경우는 동일봉토 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표 4 참조). 대부분의 옹관묘가 토기의 상부가 결실된 채 확인되며, 봉토는 남아 있지 않다.
옹관의 구조는 합구식이 47기, 단옹식이 3기이다. 합구식의 규모는 길이 64~143㎝, 너비 40~83㎝이며, 단옹식의 규모는 길이 61~87㎝, 너비 37~78.5㎝로 비슷하다. 옹관의 주축방향은 목곽묘와 동일하게 동서방향을 기본축으로 하며 약간씩 남북으로 틀어진다. 두향은 주축방향이 일정하고 경식의 출토 위치로 보아 동향으로 판단된다. 합구식옹관묘는 대다수가 동편에 주옹이 서편에 막음옹이 위치한다. 주옹은 장동옹, 단경호, 발, 대호, 시루를 사용하였으며, 막음옹은 (파수부)발, 단경호, 장동옹, 노형토기 등을 사용하였는데 모두 와질이다. 단옹식옹관묘는 대호만 확인되며 구연부를 서향으로 매납하였다. 부장유물은 3호, 10호, 39호에서만 출토되는데 3호의 경우, 노형토기 1점이 주옹과 접해서 확인되며, 10호의 경우는 주옹내에서 수정제곡옥 2점이 출토되었다. 39호는 주옹바닥에서 수정제곡옥 2점, 도자 1점, 막음옹의 아래에 단경호 2점, 주옹 아래에서 철촉 2점이 출토되었다.
(3)土器埋納遺構
토기매납유구는 총 8기가 확인되어 5기가 조사되었다. 定置 또는 倒置된 상태로 토기를 매납하는 점에서 옹관묘와는 차이를 보이므로 墓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토기매납유구라 칭한다. 주로 대호를 매납하였으며, 단경호와 발도 확인된다. 평면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을 띠며, 규모는 길이 32~125㎝, 너비 32~122㎝, 잔존깊이는 14.5㎝ 미만으로 상부는 거의 삭평되었다.
3) 三國時代
현재까지 조사된 삼국시대 유구는 유물포함층, 수혈, 굴립주건물지, 구, 습지 등이 있다. 삼국시대 1호 구를 제외한 대부분 유구가 유적의 남쪽(5구역)에 위치한 습지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이 습지 주변으로 유물포함층, 수혈유구, 굴립주건물지가 서로 중첩된 양상이다.
(1) 遺物包含層
유물포함층은 습지의 남동편을 감싸는 형태로 습지의 경사면을 따라 퇴적된 양상으로 형성되어 있다. 규모는 길이 40m, 너비 10m내외이다. 남쪽부분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3호 도로유구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다. 유물포함층에서는 다량의 토기유물과 철광석․용범편․송풍관편 등의 제철유구와 관련된 유물이 다량 출토하고 있다.
(2) 竪穴遺構
수혈유구는 유물포함층 아래와 주변에서 확인되는데 총 6기가 조사되었다. 수혈의 평면형태는 부정형 또는 원형을 띠며, 규모는 길이 132~700㎝, 너비 122~570㎝, 잔존깊이 19~50㎝이다. 수혈 내에는 별다른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으며, 1호와 3호의 경우, 수혈 바닥에 부정형의 소형구덩이가 확인된다. 수혈의 내부는 모두 암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다. 유물은 고배, 장경호, 배, 기대, 시루, 옹, 개, 방추차 등의 토기류와 철광석․용범편․송풍관편․노벽편 등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된다. 토기류는 동일개체를 의도적으로 깬 양상이다.
(3) 屈笠柱建物址
굴립주건물지는 수혈군의 동편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장방형이며, 주축방향은 N-30˚-E이다.
(4) 濕紙
습지는 부정형의 평면형태를 띠며, 바닥면이 불규칙적이다. 규모는 현너비 50~60m, 최대깊이는 60㎝이다. 층위는 흑갈색점토층과 회황갈색점토층으로 크게 2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국시대 유물포함층을 덮고 있다. 출토유물은 습지최상층에서 인화문토기가 확인되며 바닥면의 출토유물은 유물포함층 및 수혈과 유사하다.
(5) 溝
구는 유적의 북쪽과 남쪽에서 확인되는데, 진행방향과 규모,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구의 북쪽 끝부분은 통일신라시대 1호 도로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다. 유구진행방향은 남북방향으로 유적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구의 남쪽은 남북으로 진행하다 가 서쪽으로 굴절되어 조사경계 밖으로 연장된다. 평면형태는 ‘ㄴ’자형이며, 단면형태는 ‘U’자형을 띤다. 구는 암갈색사질점토와 역석층을 비스듬하게 굴착하였으며, 규모는 추정길이 300m, 너비 150~420㎝, 깊이 50~65㎝정도이다. 구의 내부토는 ‘U’자상으로 최하층에 자갈과 모래가 다량으로 섞인 황갈색사질점토가 퇴적되어 있다. 유물은 기대 대각편, 용범편, 호편, 시루편, 고배대각편, 대호편, 대부완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북쪽으로 갈수록 바닥레벨이 낮아지고 북쪽 끝부분에서는 넓게 퍼지는 양상으로 보아 물이 흐른 수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의 2차적인 용도는 알 수 없다.
4) 統一新羅時代
(1) 道路遺構(사진 15)
도로유구는 유적의 북쪽에 2기, 남쪽에 1기 총 3기가 조사되었다. 북쪽의 도로는 동일유구로 보아도 무관하지만 진행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1구역의 전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호 도로와 2구역북편을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2호 도로유구로 구분된다. 도로의 규모는 1호 도로의 경우, 길이 120m, 너비 40m이며, 2호 도로는 길이 50m, 너비 25m이다. 1호․2호 도로는 진행방향이 다르지만 남동쪽의 어느 지점에서 갈라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일단 경지정리에 의해 상부가 삭평되어 서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남쪽으로의 진행방향이 동일하고 형태면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축조방법은 굴착이나 판축의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일정 범위의 평탄한 자연지면을 그대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흔적은 오랜 기간의 사용으로 인해 여러 갈래의 중첩된 차륜흔으로 남아 있다. 도로의 평면형태는 차륜흔의 방향에 따라 변화되는데 차륜흔은 직선형 또는 곡선형을 띤다. 차륜흔의 단면형태는 일반적으로 ‘U’자형이나 수 차례의 중복사용으로 인해 ‘W’자형을 띠기도 한다. 구(차륜흔)의 규모는 너비 10~40㎝, 잔존깊이 5~40㎝이며, 차륜의 폭은 180~200㎝이다. 구내에는 황갈색사질점토 또는 암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으며, 바닥에는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깐 잔자갈이 오랜 사용으로 인해 견고하게 다져진 상태이다.
유적 남쪽에 위치한 3호 도로는 북편의 1호․2호 도로와는 규모와 형태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3호 도로는 5구역의 남서편에 위치하며 2조의 차륜흔만 확인된다. 도로의 남쪽부분은 삼국시대유물포함층과 삼국시대 1호 수혈유구를 파괴하고 있다. 도로의 진행은 남쪽과 서쪽의 조사경계 밖으로 이어지며 서북방향으로 진행되다가 북쪽으로 약간 굽어진다. 도로의 축조는 동쪽에 접한 삼국시대 濕地를 우회하면서 원지형의 지면을 감안하여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도로의 규모는 현길이 42.7m, 너비 2.1m 내외이다. 차륜흔의 형태와 규모면에서 1․2호 도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시기로 보아진다. 다만, 3호 도로는 역석층에 형성되어 도로 전면에 잔자갈이 깔린 점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도로유구의 사용시기는 출토유물이 빈약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도로가 형성된 암갈색사질점토층에서 점원문이 시문된 토기편이 확인되고, 구 바닥에서 출토된 종장연속마제형문(7세기후반-8세기전반)이 시문된 토기편과 기와편, 당삼채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로 판단된다.

2. 遺物

덕천리Ⅰ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형성된 복합유적으로 유물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유물은 대다수가 주거지 출토유물로 현재까지 발, 호, 홍도 등 토기류 30점과 석부, 석도, 지석, 석착, 미완성석기, 박편 등의 석기류 43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1기 확인된 석관묘에서 무경식석촉 3점, 미완성석검 2점과 함께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원삼국시대유물은 주로 목곽묘와 옹관묘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부 불명유구와 토기매납유구에서 소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토기, 철기, 장신구로 구분되는데, 현재까지 수습된 유물은 토기 357점, 철기 298점, 장신구 18점이 출토되었다. 목곽묘의 경우 토기에 비해 철기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토기는 대부분이 와질토기이며, 일부 도질토기가 공반되기도 한다. 목곽묘에서 출토된 토기는 단경호, (유개)대부광구호, (유개)대부직구호, (유개)노형토기, 고배, 양이부호, 발, 파수부호, 개 등이며, 16호묘, 70호묘, 80호묘에서는 오리모양토기와 신선로형토기가 공반되어 출토되기도 한다. 철기는 철모, 철부, 철겸, 따비, 철촉, 환두대도, 철착, 판상철부, 도자 등이 출토되는데 철모의 비중이 가장 높다. 장신구로는 수정제곡옥, 수정제다면옥, 마노제다면옥, 유리제환옥으로 구성된 경식이 주를 이루는데 15호묘와 24호묘에서는 금박샌드위치구슬이 출토되기도 한다. 옹관묘는 장동옹, 단경호, (파수부)발, 대호, 시루, 노형토기 등을 주옹과 막음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국시대 유물은 고배, 장경호, 배, 기대, 시루, 옹, 개, 방추차 등의 토기류와 철광석, 용범편, 송풍관편, 노벽편 등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습지주변에 형성된 유물포함층과 수혈에서 출토되었다. 1호 구의 출토유물과 비교하면, 토기는 기종의 차이를 보이나 제철관련유물이 출토되는 점에서 동일시기로 보아도 무관할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유물은 당삼채편, 인화문토기편, 기와편, 어망추, 구슬 등이며 대부분 도로의 차륜흔(구)내에서 출토되었다.

이상과 같이 덕천리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다양하게 확인되며 각 시대별 유구의 시기는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석관묘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늦은 시기로 판단되며, 원삼국시대 분묘는 3~4세기대, 삼국시대 유구는 5~6세기대, 도로유구는 통일신라시대(7~8세기대)로 판단된다.


Ⅴ. 調査結果

1. 본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충적평야지대에 위치한 평지성취락으로 주거지의 구조와 내부시설에 있어 평지성취락연구에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되며, 1호 석관묘에서 확인된 화장의 흔적은 당시 묘제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2. 현재까지 경주 인근의 원삼국시대의 분묘는 경주 황성동과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언양방면을 제외한 영천방면의 사라리유적, 포항방면의 옥성리유적, 울산방면의 조양동․구정동․구어리․중산동유적 등 동서남북의 교통로상에 분포하고 있다. 이번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지 않았던 언양방면에 본 유적의 존재는 초기신라의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또 다른 집단의 존재를 확인한 점에서 그 의미가 크며, 초기 신라 정치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 할 것으로 판단되며, 아울러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곽묘, 옹관묘, 토기매납유구, 불명유구 등은 원삼국시대의 묘제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3. 유적의 남쪽과 북쪽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는 도로의 규모와 축조방법상 경주 왕경지구에서 확인되는 도로와 차이를 보이며, 그 용도는 조사구역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다만, 도로의 차륜흔 내에서 확인된 제철관련 슬래그와 차륜흔의 깊이, 그리고 유적북쪽의 지근거리에 덕천리 야철지가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제철과 관련한 수송용 도로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재) 영 남 문 화 재 연 구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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