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조사개요
1. 유적명 : 경산 옥곡 도시개발사업지구내(1구역)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2. 조사대상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옥곡동 87번지 일원
3. 조사대상유적 및 면적 가. 유적 : 조선시대 우물, 구상유구, 적심 나. 면적 : 3,250m²
4. 조사기간 : 2006년 7월 5일 ~ 2006년 8월 29일
Ⅱ. 調査對象地域의 立地와 環境
조사대상지역은 행정구역상 경북 경산시 옥곡동 87번지 및 주변 일원으로서, 경부선 철로의 서쪽 산기슭에 위치하며 남쪽은 서부택지개발지구의 남서모서리, 서쪽은 산기슭을 따라 대구 시지지구 방면으로 이어지는 월드컵로, 북쪽은 월드컵로에서 경산시내에서 남천을 건너기 위해 새로 놓은 서옥교로 이어지는 왕복 4차선 도로가 접하고 있다. 조사대상지가 위치한 주변의 자연지리적 환경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비교적 험준한 산지들과 협곡평야지대로 형성되어져 있는데 서쪽과 남쪽은 성암산(해발469m)을 주봉으로 하는 험준한 산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으로 약 500m정도 떨어져 蛇行性의 남천이 경산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남천과 조사대상지 사이에는 남천의 하류지역 범람원에 속하면서도 성암산에서 동쪽을 뻗어 내려오는 여러 지릉의 말단부와 각각 접하여 있는 합류선상지형 충적평야지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최근에 한국토지공사에서 시행완료한 경산 서부택지개발지구로 조사대상지역과는 경부선 철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도시화된 주거 밀집 지역 및 옥산1택지개발지구가 위치한다. 조사대상지역의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유적을 살펴보면, 경부선 철로의 동쪽으로 경산 서부택지개발지구 현장에서 조사된 경산 옥곡동 원삼국 및 청동기시대 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3)과 약 1㎞정도 떨어져 경산읍성지, 남쪽으로는 옥곡동 지석묘 및 유물산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으로 약 2㎞정도 떨어진 지점에 시지지구 생활유적과 욱수동 생활유적, 옥산동 가마유적, 시지지구 고분군, 욱수동 고분군, 노변동 고분군, 중산동 고분군 등의 다수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도면 1․2참조) 조사대상지역은 주거지역과 과수, 각종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일부 분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동쪽경계부분인 경부선의 주변지역은 복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Ⅲ. 조사내용
가. 遺構 1) 朝鮮時代 ① 우물 1호 유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약 2m에 구상유구 2호가 동서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유구는 동-서 방향의 사면을 일부 굴착하여 편평하게 면을 만든 곳의 서쪽 끝에 위치한다. 평면 형태는 원형이고 하단은 방형에 가깝다. 단면형태는 상광하협형이다. 굴광의 상면 너비는 236×224㎝, 우물벽석은 152×144㎝, 최대 깊이 90㎝, 해발고도는 71.5m이다. 우물 바닥면으로부터 5~10㎝까지 뻘이 채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등색 사질층과 암갈색 사질점토층이 채워져 있다. 바닥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등색 생토층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석축의 최하단은 길이 30~40㎝의 큰 할석을 세워 방형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유물은 상부 수혈과 석축 사이의 보강토 내에서 자기 대접을 재가공한 자기류 2점, 토제 어망추 1점이 출토되었고 석축 최하단 기반석 아래에 접시가 깨어져 박힌 채 출토되었다. 이 우물의 시기는 출토 유물로 보아 조선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
② 구상유구 1호 유구는 유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북동-남서방향으로 약 1,530㎝ 정도 뻗어있다. 후대의 굴착에 의한 교란으로 인해 유구의 중간 일부가 유실되어 구상유구 1-1호와 1-2호로 나누어진다. 유구의 평면 형태는 거의 ‘一’字형이고, 규모는 길이 1,530cm, 최대 너비 300cm, 최대 깊이 155cm, 해발고도 71.2m~72.8m이다. 유구의 단면 형태는 "U"字형이며, 내부토는 자갈이 다량 함유된 생토층에 비해 자갈을 거의 포함하지 않은 2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층인 1층은 비교적 굵은 사립으로 구성되고 생토층에 비해 경도가 높고 점성이 강한 흐린 황갈색 (10YR 5/4) 사질점토층이다. 1층 내부에 할석이 다량 포함된 것으로 보아 교란된 것으로 보인다. 1층의 두께는 2~17cm정도이다. 상층인 2층은 1층에 비해 경도가 낮고 점성이 약한 흐린 황등색 (10YR 7/3) 사질점토층이다. 2층에도 할석을 일부 포함하며, 후대에 흘러 들어온 것으로 판단되는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2층의 두께는 2~13cm정도이다. 유물은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 이후 것으로 판단된다.
③ 구상유구 2호 유구의 유적은 북서쪽에 위치하고 북동-남서방향으로 약 12Km가량 뻗어 있다. 유구의 주축 방향은 N-52°-E이며, 규모는 길이 1,230cm, 너비 200cm, 최대 깊이 15cm, 해발고도는 72.7m~71.5m이다. 유구의 평면 형태는 거의 ‘一’字형이며 남서쪽에서 동-서 방향의 사면의 서쪽 끝에서부터 북동 방향으로 내려온다. 단면 형태는 "U"字형이며, 토층은 자갈이 다량 함유된 생토층에 비해, 자갈을 거의 포함지 않은 연한 황갈색 사질 점토층 (10YR 4/4)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토는 생토층에 비해 점성이 강하며 경도가 낮고, 할석이 일부 포함 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 저부와 자기 대접 저부편이 출토되었으며 완편 4점은 조선시대 것으로 보인다. 무문토기 저부는 청동기 시대의 것이지만 후대에 흘러든 것으로 보인다.
④ 적심 1호 구상유구 2호에서 서쪽으로 1m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후대의 건물지 조성에 의해 상부 일부가 소실되었다. 적심의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직경 74~77cm이다. 적심 설치방법은 기반층 황등석 사질점토를 굴착하여 10-15cm 가량의 천석과 할석을 이용하여 1-2층의 원형으로 적심을 채운 형태이다. 적심에서는 암키와편 2점이 출토되었다.
나. 出土遺物 1) 청동기시대 구상유구 2호에서 무문토기 저부편 1점이 출토되었다. 바닥면에서 출토되었으나 구상유구 2호의 바닥면에서 다수의 자기류가 출토되는 정황으로 보아, 후대에 흘러 들어 온 것으로 구상유구 2호의 축조 연대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무문토기 저부편은 굵은 세사립을 다량 포함하고 있으며 외면에 지두흔이 관찰된다.
2) 조선시대 이후 우물, 구상유구, 적심 등에서 조선시대 이후의 자기류, 토기류, 기와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우물에서 불명 자기류 2점이 출토되었는데 대접을 재가공한 것이다. 1점은 1/2가량만 재가공되어 있다. 또한 토제 어망추 1점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의 자기류는 상부에서 수습되었는데 대부분은 대접의 저부이고 그 밖에 종지가 2점 출토되었다. 형태로 보아 조선시대 이후의 것으로 판단된다.
Ⅳ. 조사결과
1. 조사 대상지에서는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인근에서 조사된 경산 서부택지개발사업지구 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달리 청동기시대 관련유구 및 원삼국시대 관련유구가 확인되지 않았고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는 본 유적이 남천과 떨어져 비교적 높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 본 유적에서는 조선시대의 우물 1기, 구상유구 2기, 적심 1기 등 총 4기가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북쪽 사면에 유구가 위치하고 있다. 우물은 단면형태가 상광하협형이고 하단에 큰 석을 세워서 방형에 가깝게 조성하였다. 이는 대구 시지생활유적에서 다수 확인되었던 조선시대의 우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구상유구 2기도 우물의 인근에 위치하여 경사면 방향인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위치하고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의 자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대접 저부, 완 저부, 재가공 자기 등이 출토 되었다. 이밖에도 기와편이 우물, 구상유구, 적심에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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