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調査對象地域의 立地와 環境
조사대상지역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삼성리 일원으로, 동쪽에는 仙義山(756.4m)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淸道로 넘어가는 남성현고개가, 서쪽에는 動鶴山과 上院山(674.1m)이, 북쪽에는 栢樂山(486.4m)이 둘러싸고 있다. 유적이 소재한 지점의 동쪽에 위치한 남천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다 동쪽에서 내려오는 송백천과 합류하여 북서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남천면소재지의 서쪽으로 지나 경산시를 관통하여 약 11km 정도 흘러가서 금호강과 합류하게 된다. 따라서, 조사지역은 경산시에서 청도로 이어지는 계곡부의 안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사지역은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 말단부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초입에 해당하는 곳으로 경지정리가 이루어져 있어 대체로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유적은 남북방향으로 모두 세 지점로 나누어져 있으나, 지형은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적 서쪽으로 거의 근접해서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동쪽으로 100m정도 떨어져 南에서 北으로 흐르는 南川이 위치한다. 이 지역은 남북으로 흐르는 南川을 따라 川兩岸에 일부 조성된 곡간지대를 중심으로 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있다. 조사지역의 토질은 홍수퇴적물인 사력층으로 벼농사는 불가능한 상황이고, 포도나무와 밭작물이 일부 경작되고 있다. 주변 유적으로는 조사지역에서 북서쪽으로 700m 정도 떨어져 삼성리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 2003, 『경산 삼성리 665번지 유적』)이 발굴조사되었고, 북쪽으로는 남천면소재지 남쪽에 삼성리지석묘군 1·2가 위치한다. 또한, 경산방향으로 남천을 따라가면서 산전리지석묘군, 협석리지석묘군, 옥곡동 지석묘군이 위치한다. 남천에서 갈라지는 분류천으로 시지방면에는 사월동지석묘군, 시지동지석묘군, 매호동지석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이 외에 유적 주변에는 삼성리고분군과 대명리 고분군, 구일리산성등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본 유적이 소재한 지역은 청동기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다수 산재되어 있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다수 조성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조사내용
가. 遺構
1) 支石墓
가. 1호
"삼성리지석묘군3"의 1호로 알려져 있던 것으로, 북쪽으로 14m 정도 떨어져 2호 지석묘가 위치하고 북서쪽으로 약 230m 정도 떨어져 3호가 위치한다. 상석은 평면 삼각형의 형태이고, 단면은 부정형에 가깝다. 상석의 동쪽과 북쪽은 자연면 그대로이나, 서쪽과 남쪽은 절리된 상태이다. 상석은 290×275×260cm(길이×너비×높이)이고 무게는 27t으로 2·3호보다 무겁다. 상석아래에서 부석이 노출되었는데, 정연한 상태가 아니라 무질서한 상태로 노출되었다. 부석은 대소의 할석을 2∼3단으로 쌓아서 조성하였다. 부석의 범위는 南-北 3m, 東-西 3m 범위내에서 확인되었고,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부석을 제거하자 구지면이 확인되었고, 매장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상석을 기준으로 북서쪽방향과 남서쪽방향으로 근대 밭경계로 보이는 석축이 2단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석축사이에서 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경계석과 상석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 2호
"삼성리지석묘군3"의 2호로 알려져 있던 것으로, 남쪽으로 14m 정도 떨어져 1호 지석묘가 위치하고 북서쪽으로 약 216m 정도 떨어져 3호가 위치한다. 상석의 평면형태는 반원형에 가깝고, 단면은 부정형에 가깝다. 상석은 280×230×164cm(길이×너비×높이)이고, 무게는 15t으로 1·3호에 비해 가볍다. 상석 아래에는 30여개의 천석이 무질서하게 노출되었다. 부석 아래에서는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 3호
"삼성리지석묘군3"의 3호로 알려져 있던 것으로, A구역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지석묘는 현재 상석과 상석에서 북쪽으로 연접된 부석이 일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상석은 가운데가 東-西 방향으로 깨어져 있어 남쪽 상석은 제위치에 정연하게 남아 있는 반면, 북쪽 부분은 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상석이 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외면상으로는 크게 손상을 입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석은 상석 아래와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유실되었고, 경계석도 확인되지 않아 부석의 평면형태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상석은 평면 장방형의 입면체로, 규모는 길이 360cm, 너비 240cm, 높이 175cm이고 주축방향은 N-16°-W이다. 부석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상석 아래의 부석은 정연하게 남아있어, 이를 통해 볼 때, 부석은 2단으로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부석의 높이는 30∼40cm이고, 대체로 40cm 내외의 자연석과 할석을 사용하여 조성되었다. 매장시설은 확인되지 않았고,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2) 石棺墓 가. 1호
석관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지점에 2호 석관이 평행하게 조성되었고, 북서쪽으로 17m 떨어진 지점에 4호 석관묘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남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 3호 석관묘가 위치한다. 시굴트렌치에 의해 석관의 북단벽과 양장벽 일부가 유실된 상태이다. 주축방향은 N-3。-E이고, 규모는 184×60×55cm(길이×너비×깊이)이다. 석관의 개석은 남단벽 앞쪽과 중앙에 일부 남아 있었는데, 2단으로 조성되었다. 개석은 길이 55㎝, 너비 30㎝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고, 개석 사이와 상면에는 작은 할석을 채워넣어 조성하였다. 석관 중앙에는 깨어진 개석이 원위치에서 약간 이탈되어 노출되었고, 석관 내부에는 토사가 채워져 있었다. 동장벽은 4단정도 남아있고, 제일 하단의 벽석은 길이 40㎝ 정도되는 할석을, 그 상면에는 30㎝ 내외의 할석을 세로눕혀쌓기하였다. 3단과 4단은 가로눕혀쌓기하여 아래쪽과 구별된다. 서장벽 역시 동장벽과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조성되었고, 상단의 일부 벽석이 유실된 상태이다. 동장벽과 남단벽은 서로 엇물려있는 반면, 서장벽과 남단벽은 엇물려 있지 않고, 남단벽에 서장벽이 덧대어져 있다. 남단벽은 4단정도 남아 있는데, 제일 하단은 1매의 장대석을 세로눕혀쌓기하였고, 그 위로 2·3단에는 25∼30㎝ 정도의 할석을 세로눕혀쌓기하였다. 제일 상단에 해당하는 4단에는 20㎝ 내외의 할석을 가로눕혀쌓기하여 조성하였고, 벽석사이에는 작은 할석을 끼워넣어 마무리하였다. 석관 바닥에는 10∼20㎝ 정도의 납작한 천석을 1겹 깔았고, 바닥석 일부가 양장벽석에 깔려있는 양상으로 보아 바닥석을 놓은다음, 벽석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남단벽 최하단석이 동장벽 2단석에 의해 눌려있는 점으로 보아, 남단벽석을 조성한 다음, 동장벽을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과 묘광사이에는 기반층인 사력토와 같은 사력토가 채워져 있어 평면에서는 묘광이 확인되지 않는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나. 2호
1호 석관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지점에 평행하게 조성된 소형 석관이다. 석관의 묘광이 1호 묘광과 떨어져 있고, 구지표가 유실된 상태이므로 1호와의 축조 선후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석관의 장축방향이 거의 일치하고 근거리에 조성된 점으로 보아 1호 석관과 동시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주축방향은 N-4。-E이고, 규모는 64×27×28cm(길이×너비×깊이)이다. 개석은 남아 있지 않고 내부에는 사력토가 채워져 있다. 양장벽은 30∼40㎝ 정도의 판석 2개를 세로세워쌓기하여 조성하였고, 양단벽은 1개의 판석을 세로세워쌓기하였다. 바닥석 역시 30㎝ 내외의 판석 4개를 깔아서 조성하였는데, 바닥석이 벽석에 눌려 있는 상태이다. 이로 보아, 바닥석을 깐 다음, 벽석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벽면 모서리는 서로 덧대이도록 조성하였다. 벽석과 묘광 사이에는 기반층과 동일한 사력토가 채워져 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다. 3호
북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 1호 석관묘가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10m 떨어진 지점에는 추정경작지(삼국시대로 추정)가 조성되어 있다. 석관의 주축방향은 N-4°-W로 거의 남북방향이며, 규모는 길이 192㎝, 너비 42㎝, 깊이 68㎝이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290㎝, 단축 142㎝이다. 개석은 2중으로 조성하였는데, 개석 상단은 북단벽쪽에 한 개가 남아 있고, 하단은 그 아래에 4개가 남아 있다. 나머지 개석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개석은 길이 70cm, 너비 30cm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점성이 강하고 2∼5㎜정도의 모래자갈이 섞인 암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져 있었다. 동장벽과 서장벽은 5∼6단으로 축조하였는데, 벽석은 30cm 내외의 할석을 이용하여 아래쪽 4단은 세로눕혀쌓기하였고, 위의 2단은 가로눕혀쌓기하여 구별하였다. 양단벽도 장벽과 동일하게 5∼6단으로 축조하였는데, 30cm 내외의 할석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남단벽은 아래 3단은 가로눕혀쌓기하였고 위쪽 3단은 세로눕혀쌓기하였다. 북단벽은 아래 3단을 세로눕혀쌓았고, 위쪽 3단을 가로눕혀쌓기하여 남단벽과 구별된다. 벽석 사이에는 작은 할석을 끼워넣어 마무리하였다. 양장벽과 단벽은 엇물리지않고 서로 덧대어져 있다. 바닥에는 30∼40cm되는 판석을 1겹 깔았고, 바닥석이 장벽과 단벽에 눌려있는 양상으로 보아, 바닥석을 놓은 다음, 벽석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과 묘광사이에는 기반층인 사력토와 동일한 사력토가 채워져 있어 평면에서는 묘광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서쪽은 기반층 일부가 점토로 구성되어 있어 묘광이 확인된다. 석관묘 남서쪽에는 주위와는 다른 양상의 잔자갈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석관묘 조성후 잔자갈을 유구 상면에 전체적으로 깔아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라. 4호
남동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 1·2호 석관묘가 위치한다. 석관은 대부분 유실되어 바닥석 2개만 남아 있다. 바닥석을 기준으로 주축방향은 N-S로 남북방향이며, 바닥석은 길이 70cm, 너비 35cm 정도이다. 유물은 바닥석 사이에서 마제석검의 검신부편 1점과 홍도편이 출토되었다.
3) 敷石遺構
가. 1호
3호 석관에서 남쪽으로 46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북서쪽으로 약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부석유구 2호가 위치하고 있다. 부석은 상당부분 유실된 상태이나,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의 경계석이 일부 남아 있어 「ㄷ」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경계석 안쪽에는 작은 할석을 깔았고, 경계석의 양상을 보아 동-서 방향으로 장방형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의 경계석을 기준으로 한다면, 부석의 주축방향은 N-88°-E이다. 부석의 평면 규모는 현재길이 500㎝, 너비는 420㎝이다. 경계석은 50×40×15∼20㎝(길이×너비×높이) 정도의 치석된 편평석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경계석 중 일부는 2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단은 최소 2단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의 높이는 약 40㎝ 이다. 부석유구 내부에서는 별다른 시설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부석 동쪽에서 무문토기 저부편이 수습되었다. 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
나. 2호 남동쪽으로 약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부석유구 1호가 위치하고 있다. 부석은 기반층인 사력층 위에 조성되어 있다. 부석은 현재 기단석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열지어 일부 남아있는 상태로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다. 따라서 부석의 규모는 전혀 알 수 없고, 유물 또한 출토되지 않았다. 기단석은 4개정도 만이 남아있는 상태로 길이 50cm, 너비 30cm, 높이 20cm 정도의 치석된 편평석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기단석이 잔존하는 양상과 기단석 위로 넘어져 있는 돌들로 보아 최소 2단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내에서는 별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부석 동쪽에서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유구의 성격은 알 수 없다.
4) 推定耕作地
북쪽으로 10m 떨어진 지점에 3호 석관묘가 조성되어 있고, 남쪽으로 7m 떨어진 지점에 부석유구 2호가 위치하고 있다. 경작지는 기반층인 사력층위에 형성된 암갈색사질점토층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사력층에 형성된 부석유구보다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근래 경작에 의해 부분적으로 훼손·삭평되어 있으나 잔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고랑으로 보이는 溝가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5개정도 조성되어 있는데, 범위는 남-북 20m, 동-서 8m 정도이다. 溝의 깊이는 3∼6㎝ 정도이다. 내부에는 암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져 있었다. 溝의 단면형태는 완만한 "U"자형이다. 바닥의 높이는 대체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유물은 내부토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바닥에 토기편이 박혀있는 상태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溝와 함께 柱穴이 1개 확인되었다. 柱穴의 평면형태는 원형이고, 지름 16㎝, 깊이 3㎝이다. 내부에는 암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져 있다. 추정경작지와의 관련성은 알 수 없다.
나. 出土遺物
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석관묘 4호에서 석검의 검신편과 홍도편이 출토되었고, 1호 석관묘 내부에서 홍도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추정경작지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 외 석검 병부편, 무문토기 저부편, 무문토기 파수편, 토제 방추차 등이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지석묘에서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3. 調査結果
삼성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석관묘, 부석유구 및 삼국시대 추정경작지 등 모두 10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지석묘는 3기가 조사되었는데, 부석은 남아 있었으나 매장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3호 지석묘는 부석이 정연하게 조성되었으나, 1, 2호와 동일하게 매장시설은 조성되지 않았는데,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유적이 최근 밀양 살내유적과 신안유적에서 확인되어 밀양지역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판단된다. C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석관묘 4기, 성격 미상의 부석유구가 2기 조사되었다. 이처럼 좁은 지역에서 매장유구가 다수 조사된 점은, 인근에서 조사된 주거유적(삼성리665번지 유적)을 통해 볼 때,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다수 거주하였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南川 水系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지석묘군과 시지지역의 지석묘군과의 연관성도 상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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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 3호 전경(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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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경작지 전경(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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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 2호 전경(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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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 3호 전경(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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